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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literature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by 대담한도약 2021.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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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소포클레스(기원전 497/6~406/5)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올드 보이>는  박찬욱 감독이 「오이디푸스 왕」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란 책이 있다.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석한 책인데 <오이디푸스 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가장 짜임새 있게 만들어낸 드라마라고 한다. 「시학」또한 정말 대단히 유익한 책인데 당대의 문화를 알지 못하면 사실 읽어내기가 여간 쉽진 않은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간략하게 한번 블로그에 추천해보려고 한다.

 

그나저나 <오이디푸스 왕>은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토록 명작으로 후대까지 길이길이 전해져오는 것일까?

 

 

 


 

 

 

 

 오이디푸스는 과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라는 나라의 왕이 된다. 어느 날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여 처남인 크레온을 시켜 포이보스의 집에서 신탁을 받아오게 하였다. 

 

  • 포이보스 : 아폴론을 의미한다. 아폴론은 예언,의료,궁술,음악,시의 신이다.

 

크레온이 가져온 신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땅에서 자라난 오욕을 나라에서 몰아내라. 치유할 수 없을 때까지 품고 있지마라.

사람을 추방하거나 피는 피로 갚아라.

 

 

 여기서 말하는 피는 바로 살해당한 선왕의 피를 의미하였다. 선왕을 살해한 자를 추방하거나 피로 갚아라는 예언. 오이디푸스는 나라의 역병을 끊어내기 위하여 신탁을 따라 살인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코로스장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대사에서 우리는 '비극'이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아아, 슬프도다! 지혜가 아무 쓸모 없는 곳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 비극이란 인간의 강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방도가 없이 받아들여야할 때 일어난다. 제 아무리 지혜로운 자의 능력도 비극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공부하고자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참고하면 된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재촉에도 범인을 밝히기를 계속해서 꺼려하고 거부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화에 결국 그에게 그 정체를 말해준다.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그대란 말이오!
더 화나도록 다른 것도 말씀드릴까요?
그대는 부지중에 가장 가까운 핏줄과 가장 수치스럽게 동거하면서도,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소.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는 그가 자신을 능멸하고, 또 모함한다며 그를 저주한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이 모든 것들이 크레온의 음모라고 생각하여 크레온을 적대시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은 미궁 속을 헤매는 동안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의 부인)이 등장하여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다툼을 중재한다. 그녀는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사를 예언할 수 없다며 신탁을 믿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과거 라이오스 선왕이 받았던 신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라이오스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받았다.

 

너와 너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너는 죽게 되리라.

 

그러나 라이오스 선왕은 세 갈래길에서 도적들에게 살해를 당하였었다. 게다가 예언에서 말하는 아들은 그것을 두려워한 라이오스왕이 태어난지 사흘만에 산에 갖다버렸으니. 과거의 그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오카스테는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오카스테의 의도와는 달리 갑자기 혼란스러워하는 오이디푸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는 불안에 떨며 이오카스테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는 과거 술취한 난동꾼에게 너의 아버지는 진짜 너의 아버지가 아니란 소리를 들었다. 그 후 그것이 소문으로 마을에 쫙 퍼졌고 오이디푸스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나머지 포이보스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너는 네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며 너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

 

그는 그 예언이 이뤄지지 않도록 마을에서 멀리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 와중에 이오카스테가 언급한 세 갈래길에서 어떤 남자가 탄 마차와 그 무리들을 만났고 그들과 시비가 붙은 나머지 그들을 살해하였었다.


점점 풀리는 사건의 실마리들, 하지만 그 범인은 그 자가 아니여야만 한다. 그는 바로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였기 때문. 살해자가 자신이 아니기 위해선 라이오스 선왕을 죽인 것은 이오카스테가 도적떼라고 말했던 것처럼 다수의 사람들이여야 한다. 외톨이 나그네라면 그것은 필시 자신이며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부인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이였다. 

 

 이 때 한 사자(使者)가 나타나 오이디푸스가 생각하는 자신의 아버지는 난봉꾼의 말대로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목자에게 받아서 준 아기가 오이디푸스였다고 한다. 이오카스테는 그 말을 듣고 괴로움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방으로 달아난다.

 

 이 후 밝혀진 사건은 이러하다. 라이오스가 예언이 두려워 버린 아기는 먼 나라 폴뤼보스라는 남자에게 갔다. 그 아기는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들은 또다른 예언이 실현될까 두려워 아버지(폴뤼보스)와 어머니(폴뤼보스의 아내)의 곁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하지만 세 갈래길에서 진짜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였고, 스핑크스의 저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서 자신의 진짜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절망의 나락에 빠진다. 

 

아내는, 아니 아내가 아니라 나와 나의 자식들을 낳은 이중의 어머니는 어디있는가!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 방의 빗장을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목을 메달고 죽어있는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는 무섭게 울부짖으며 그녀의 옷에 꽂혀있던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알을 찌른다. 

 

이제 너희는 내가 겪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보아서는 안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면서도 내가 알고자 한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보거라!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서 추방되고 이 후의 이야기들로 <안티고네> 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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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오이디푸스와 아버지 라이오스. 하지만 필멸적인 인간들은 예언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수십년이 걸려 모든 예언은 이루어졌다. 어떠한가? 제 아무리 비범한 인간일지어도 결코 비극을 피해갈 수 없다.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개인에게 달렸다.  흔히 삶 속에서 비극을 마주하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 되뇌어본다. 그리고 존재의 무능함에 대해서 곱씹어본다.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왜 안되는거야?

 

 오이디푸스는 그 이유를 자신의 욕망에서 찾는다. 인간이라면 어떠한 욕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한 여자를 사랑했던 자신의 욕망이 비극을 만들어냈으며 징벌로써 자신의 두 눈을 멀게 만든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아이러니함은 위의 자기본위적인 대사에서 관찰할 수 있다. 보지 못하는 것은 정작 자신임에도 오이디푸스는 본다는 주체에 본인이 아닌 제3자를 가져온다.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되는데 필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오이디푸스가 말하는 '너희'는 의미상 본인을 상징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저주한 것이 아닐까? 자신을 그 누구보다 대단하였던 본인과 역겹고도 부끄러운 본인으로 분리시킨 오이디푸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을까? 이것은 인간의 태생적인 자애심이 만든 방어기제이다. 역겨운 것도 본인이고 대단했던 것도 본인이다. 하지만 역겨운 패륜과 근친은 본인의 의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단했던 본인의 업적들과 능력들은 과연 본인이 이뤄낸 것이 맞을까? 이것 또한 예언처럼 정해진 미래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운명이란 이름 아래 한없이 무력해진다. 그런 무력함 속에서 우리는 운명을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의지대로 이루어지면 뿌듯해하고, 이뤄지지 않으면 절망한다. 미래가 정해져있다면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의 신들이 보기엔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력하고 나아가야한다. 그렇게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좌절한다. 이 의지 또한 어쩌면 정해져있던 것이 아닐까? 비극의 굴레에 빠져 다시 한 번 삶을 곱씹어본다. 나를 곱씹어본다. 그리고 결정한다. 나는 성공할 운명이라고. 행복할 운명이라고

 

오이디푸스가 그리하였듯이 운명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운명 속의 나를 위로해본다.

 

 

※ 해당 카테고리는 도서 추천이 아닌 특정 고전문학의 줄거리에 생각을 서술한 게시물들이며 <오이디푸스 왕>은 저작권 보호 기간에 속하지 않습니다.

 

2021.06.16 - [분류 전체보기] - <고전 문학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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