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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 - <더 킬러>(The Killer,2023)(<파이트 클럽>의 연장선에서 바코드화된 현대인들을 고찰하다)

by 대담한도약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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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The Killer, 2023)- 데이비드 핀처 포스트

어제 제28회 부산 국제 영화제가 개최된 해운대에 방문하여 제가 가장 좋아하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신작, <더 킬러>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건 몰라도 이번 <더 킬러>는 여태 나온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작품과는 다르게 관객이 이해하기에 가장 막연하고 불친절한 연출이 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원래 핀처 감독은 이러나 저러나 엔딩만 봐도 대충 이 작품이 지향하는 주제의식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기 그다지 어렵진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품은 사실 조금 지루한 구간도 있고 영화를 보고도 뭐랄까, <세븐> 같은 명작이 주는 좋은 찝찝함 보단 난해함에서 오는 기분 나쁜 찝찝함이 없지 않아 느껴졌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점부터 말하면 이번 신작, <더 킬러>는 핀처 감독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어둡고 짙은 범죄스릴러의 강렬함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사실 저번엔 스릴러의 대가인 핀처 감독이 갑자기 <맹크> 같은 작품을 내버려서 작품성과는 별개로 핀처 감독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스릴러의 정서를 느낄 수 없어 많이 서운한 기분이 들었었거든요.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킬러VS킬러로 사투를 벌이는 액션씬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파이트 클럽>이나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도 어느 정도 액션씬이 있었지만 이번 <더 킬러>의 액션씬은 핀처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1등이며 다른 뛰어난 액션 영화에 비벼도 거의 최강이라고 할 정도로 스타일리쉬하고 역동감이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론 <존윅 4>보다 좋았고 거의 <와호장룡>에 견주어도 될만큼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은 그런 액션씬이 딱 한번 밖에 없었다는 점이죠.

 

또한 <더 킬러>는 핀처 감독의 다른 스릴러 작품들과 비교해봤을 때 상당히 차별화되고 신선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 동안 핀처 감독은 단 한번도 확실하게 악이라고 규정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파이트 클럽>이 있겠지만 <파이트 클럽>의 에드워드 노튼은 원래부터 반달리즘 조직의 수장이었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자동차회사의 리콜 담당 직장인이 흑화의 과정을 밟은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 <더 킬러>는 그냥 처음부터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또한 핀처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선 주인공이 단독으로 행동하고 사건을 심화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주인공인 미카엘에게 리스베트라는 여주인공이 합류하는 과정을 밟죠. 그러한 관점에서 이번 스릴러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말하자면 핀처 감독의 초기의 작품 스타일과 후기의 작품 스타일이 혼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븐>(1995)와 <파이트 클럽>(1999), <조디악>(2007) 등등 초기의 작품들은 작품의 시선이 개인이 아니라 커다란 집단, 혹은 사회 전체에 시선이 향했고 그것을 비판한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둘 이상의 집단으로 행동하였죠. 그러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후의 핀처 감독의 작품들은 커다란 집단에 시선을 향하지 않고 개인 혹은 특정 관념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2010)나 <맹크>(2020)처럼 특정인의 전대기나 일화를 다루기도 했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나를 찾아줘>처럼 삶의 가치관, 혹은 결혼 생활 같은 특정 관념을 주제의식 삼기도 했습니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은 다소 특별취급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애초에 워낙 특이 케이스인 허구의 집단 혹은 개인을 비판하고 있는 지라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부적절하고 어떠한 가치관을 다루었다고 보기에도 효과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킬러>(2023)는 이러한 핀처 감독의 초기 스타일과 최근 스타일이 혼합되어 주제 의식은 사회 전체를 향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한명의 개인으로 비롯된다는 점에서 몹시 흥미롭습니다.

 

또한 촬영적인 측면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핀처 감독은 인물 표정에 클로즈업 같은 타이트한 샷을 즐겨쓰지 않는 감독입니다. 왜냐 하면 그동안 개인의 심리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작품이랄 게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주인공이자 킬러인 마이클 패스벤더 배우의 표정을 클로즈업, 나아가 익스트림 클로즈업까지 사용할 정도로 타이트한 샷을 즐겨 사용하는 변화를 보였습니다. 아마 이런 샷사이즈를 채택한 이유는 이번 작품의 주제의식과 관련이 있겠죠. 반말로 진짜 짧게 서술하겠습니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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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1 에서 저격 암살을 준비하는 킬러 (스틸컷)

현재 우리 사회는 개인을 규정하고 감시하는 것들이 무척이나 많다. CCTV, 지문, 신분증, 여권, 신용 카드 같은 전산 기록, 통화 기록 등등 우리는 전자식으로 치환된 우리의 모든 삶의 흔적들을 통해 정체성을 규정 받는다. 그렇기에 반대로 말하면 만일 이런 기록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현대인들은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기록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객체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모두 바코드화 되어있다.' 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더 킬러> 속 주인공, 마이클 패스벤더의 배역은 핀처 감독의 전작, <파이트 클럽> 속 에드워드 노튼의 배역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조작된 가짜 신분들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신변과 신분에 관련해선 그 보안이 무척이나 철저하다. CCTV를 파악하고 지문을 감추고 신분증과 전화기, 신용 카드 등을 교체하고 폐기하기를 반복한다. 사실 어쩌면 이것은 킬러의 기본적인 소양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선 이러한 인물의 특징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더 킬러> 속 킬러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결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분이 절대 알려져선 안되는 이 킬러는 그 누구도 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작품은 개인을 바코드화 시키는 현대 사회의 억압에 도전하는 한 인간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주인공은 마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처럼 하나씩 스테이지를 격파하고 더 높은 신분에게 접근하고 도전한다. 현대 사회의 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설국열차> 같은 혁명도, 트로이 목마 같은 거창한 작전도 필요없다. 다만 신분을 위조하고 복사하면 문은 저절로 열린다. 그리고 그 종장엔 현대사회를 이끄는 핵심적인 주축이자 권력가인 자본가가 등장한다. 이것은 <파이트 클럽>에서 카드 회사를 붕괴시키려 했던 것, <설국열차>에서 열차의 엔진을 점령하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해방을 원한다.

 

그렇다면 타겟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이 킬러가 왜 그토록 독백으로 중얼대던 실용주의를 져버리고 감정적이게 복수를 하러 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암살 실패가 자신을 포함한 연인에게까지 후환이 미쳐 살해당할 위기로, 다시 말해 세상에서 지워지고 잊혀질 위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서 지워지기 싫었고 그렇게 만드는 시스템에 도전하고 싶었다.

 

이렇게 하나씩 신분의 스테이지를 격파해내는 주인공은 바코드화된 사회의 헛점을 확실히 꿰뚫고 역이용하는 영리함을 보이는데 문제는 그가 킬러치곤 완전히 냉정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그는 음악에 의존하고 약에 의존하며 스스로의 심박수를 계속해서 진정시키려고 노력한다. 마치 <파이트 클럽> 속 에드워드 노튼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속에서 불면증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위로 클럽을 나다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처방책조차 그를 완전히 진정시키지 못한다. 그는 SM플레이를 즐기려는 한 늙은 타겟의 사생활에 연민을 갖고, 자식들에게 보험비를 타주려고 하는 고용주 비서의 모성애에 연민을 가지며, 그저 길러졌을 뿐인 핏불테리어란 짐승에게 연민을 가진다. 이러한 연민들은 현대사회의 냉정한 실용주의 속에서 바코드화된 자신이 조금이나마 주체성을 가지고자 발버둥치는 하나의 자기방어적 행동으로 보여진다.

 

주인공이 자기방어적 연민을 보이지 않은 타겟은 기본적으로 4명이다. 택시기사와 자신의 연인을 해하려 한 다른 킬러, 자신의 고용주, 그리고 틸다 스윈튼이 바로 그들이다.

 

우선 택시기사와 다른 킬러, 주인공의 고용주를 분석해보자면 그들은 각각의 개인들을 단순한 바코드로 인식하는 인물들이다. 택시 기사에게 승객이 어떤 사람인진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태워주고 내려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다. 더불어 고용주와 킬러 또한 청부받고 해결하면 그만인 것이지 그 타겟과 피고용인이 어떠한 인격체인지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꽤나 이기주의적이며 바코드화된 사회의 꼭두각시이자 순응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이 주인공에게 살해당하는, 다시말해 심판 받는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상 주인공도 이러한 태도를 이상적인 태도로 여기고 살아왔기에 어찌보면 주인공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주인공은 어쩌면 이러한 이들을 살해함으로서 그동안 바코드화된 사회에 순응하고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틸다 스윈튼의 경우 위 세 사람과는 달리 특별한 구석이 있다. 바로 그러한 바코드화된 사회를 똑바로 꿰뚫어볼 뿐 아니라 그것을 이용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틸다 스윈튼은 주인공을 마주했을 때 왜 저격이나 암살을 하지 않고 위협을 무릅쓴 채 직접 만나러 왔냐고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은 영화의 초장에 저격총을 이용하여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채 타겟을 처리하지만 이후엔 근접전을 요구하는 권총과 근거리 무기를 사용하고, 신분이 노출될 것을 뻔히 알면서 타겟들을 직접 대면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바코드화된 채 정체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틸다 스윈튼은 그런 그에게 곰과 관련한 하나의 우스운 우화를 소개해준다.

 

틸다 스윈튼의 우화에서 사냥꾼은 곰을 사냥하기 위해 숲 속에 직접 뛰어들어 곰과 대면한다. 그러나 사냥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곰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인격 모독을 반복해서 당하고 만다. 사냥꾼이 반복되는 성적 착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사냥하러 오자 곰이 묻는다. '너 나를 죽이기 위해 계속 숲 속에 오는 것이 아니구나?' 어쩌면 이 우화 속 사냥꾼은 곰을 사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곰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타겟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알아봐준 이들을 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고용주 비서의 경우 주인공의 연민을 이용하여 보험금을 타고자 하는 실용주의를 보였고 틸다 스윈튼의 경우 반격을 통해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위로를 받고 타인과 연대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주인공은 그들은 살해하였다.

 

주인공은 결국 탑을 오르듯 하나씩 스테이지를 격파하고 현대사회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위치한 강력한 자본가와 조우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그를 기억조차 못할 뿐더러 상황조차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다. 주인공을 조우한, 다시 말해 심판의 순간을 마주한 자본가는 결국 어쩔 수 없었다는 이해관계적인 사연을 나열한다. 자신도 결국엔 나약한 바코드이자 피해자란 것이다.

 

주인공이 자본가를 살해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첫째로 자본가를 살해하더라도 이러한 바코드화된 사회를 붕괴시킬 수 없다는 것, 둘째로 자신의 정체를 이미 엘레베이터 cctv를 통해 발각당했다는 것, 셋째로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틸다 스윈튼의 우화를 빌려 말하자면 자신은 숲 속의 곰을 타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숲 속의 곰에게 성적 취향을 드러내고자 했단 것임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가를 살해하지 않고 연인을 데리고 도심을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잠적한다. 다시 말해 도심 속에서 권력을 쥔 소수의 사람이 아닌 도심 밖에서 평범한 다수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말이 꽤나 회피적이고 굴욕적이라 볼 수 있는데, 핀처 감독은 이러한 피학적이고 나약한 개인의 성질을 이미 <파이트 클럽>을 통해 보여준 바가 있다. 그런데 <파이트 클럽>은 그래도 망상이라도나마 반항심을 보였다면 <더 킬러>는 이제 그런 피학적인 성질을 탈피하고자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말한다. 과연 현대사회의 우리는 이러한 결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선천적인 의존성과 피학성은 핀처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단정지었다. 대신에 개인의 사회적 바코드화는 어찌할 방도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신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존중과 이해만을 나누는 사람과 연대하는 것. 장 뤽 낭시는 이러한 집단을 '무위의 공동체'라고 정의하였다.

 

근데 솔직히 이러한 주제의식이 영화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진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주인공과 완전히 연대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연인의 비중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주인공의 불친절하고 소통 없는 독백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피로감만 주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기

 

일단 핀처 감독의 철학적인 발걸음과 사회보단 개인의 심리에 더욱 조명하는 연출적 변화가 확실히 드러났기에 그런 측면으로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철학은 핀처 감독이 다루기엔 조금 버거운 듯 하다. <파이트 클럽>이야 사실 사회적 억압이 드러난다만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인간의 상반되는 행동만 보여주었던 것이기에 <더 킬러>와는 다른 관점과 주제의식이 있던 작품이지 않은가.

 

그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작품을 생각해보면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있는데, 이 또한 구조주의 철학을 다루고 있음에도 일반 대중들이 보기엔 말론 브란도의 사회반항적인 행동들이 그냥 변태적인 성향처럼 느껴질만 했기 때문에 사실 이런 주제를 잘 써먹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는 이와 관련해 <남쪽으로 튀어>라는 코미디 극이 있다. 근데 이 작품은 그래도 그런 바코드화된 사회에 정말 적극적으로 반항한다는 어필이 확연히 드러난다만 좀 뭐랄까 여러모로 거시기한 면이 있었던 거 같다. 핀처 또한 이런 구조주의 철학적 주제에 난관을 부딪힌 것이 아닐까?

 

나야 너무 좋아하는 주제지만 뭐 이런 것보단 액션씬이 너무 인상깊었던지라 차라리 차기작으로 액션씬이 무지하게 많은 스릴러 작품을 하나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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