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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ソナチネ,1993)- 기타노 다케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죽이리라. 폭력과 유머의 하모니)

by 대담한도약 202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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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티네,1993 포스터

 

 

 <소나티네>는 이 영화를 만든 일본의 거장 감독, 기타노 다케시도 스스로 인정했을 만큼 그 작품성이 훌륭한 영화이다. 한국에서 '기타노 다케시'라고 한다면 아마 대중적으론 히사이시 조의 음악 'summer'의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이 그나마 제일 유명할테고 '기타노 블루'라고 하여 기타노 다케시의 고유의 감성과 연출을 알고 있는 대중들은 공통적으로 이번에 포스팅하는 <소나티네>와 더불어 <HANA-BI> 정도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말해서 기타노 다케시 정도의 감독이라면 영화 애호가가 아니라면 아예 그 이름을 모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필자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알게 된 것은 창원에서 열린 히사이시 조 영화 음악회를 보러 가기 위해 시청한 <기쿠지로의 여름>과 <키즈 리턴> 때문이었지 느와르 때문은 아니었다. 히사이시 조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많은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음악이 만드는 감성 자체는 항상 좋은 것 같다.

 

 

 필자가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3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1. 특유의 유머감각과 서사의 조화로움

2. 직관적인 폭력성과 그것을 연출하는 특유의 건조함

 

3. 히사이시 조의 노래

 

 두 번째 이유 같은 경우엔 <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작품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유이다만 <소나티네>를 보고 확실하게 느꼈다. 왜 이 감독의 수식어로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이 붙는지. 아마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게 된 작품이 <소나티네>인 이유도 그 부분에서 크게 감명을 받아서 일 것이다. 참고로 소나티네(Sonatina)는 작은 소나타, 짧은 소나타를 의미하며 이러한 단어의 뜻은 이 영화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평소에도 블로그에 포스팅을 잘 안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가장 최근 포스팅이 5월 말이었으니 요즘 심하게 뜸하긴 했다. 뭐랄까. 블로그에 분석글을 쓰고 감상을 쓰는 것에 있어서 회의감이 많이 들었다. 필자는 그래도 평균 일주일에 영화 10편은 넘짓하게 보는 편이다. 그리고 가령 최근에 개봉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나 혹은 그냥 뒤늦게 보게 된 <리코리쉬 피자>, <아사코> 등등 여러 영화는 직접 분석글을 쓸 정도로 흥미롭거나 상당히 재밌었는데, 글을 쓸까 싶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다른 블로그나 유튜브에 분석글이 많을 건데, 그리고 내가 분석을 한다고 한들 약간의 시각만 다를 뿐 결론은 결국 비슷할텐데...' 라는 생각. 그래서 요즘 글을 참 안쓰게 된 것 같다. 아직도 분석, 소개에 대한 포스팅의 방향성을 명확히 하지 못한 상황인데 이제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분석들 또한 아마 필터 없이 포함시켜서 글을 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웬만하면 영화 속 분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이야기들과 적용시켜보는 글들을 많이 쓰지 않을까 싶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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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룰렛을 제안하는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

 

<소나티네>의 키워드

 

 이 영화를 요약할 수 있는 나만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건 '삶'이라고 하고 싶다. 아마 반발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왜 죽음이나 허무함이 아니라 삶이 키워드야?'라고 말이다. 인상 깊은 영화 속 장면들이 몇 있다. 가령 마작 게임장의 사장을 물고문시키는 장면이라던지, 위의 스틸컷 속 상황이기도 한 러시안 룰렛 장면, 암살자가 걸어와 해변가에서 자신의 부하를 죽이고 가는 장면 등등. 이 영화 속에는 너무나 쉽게 살인이 일어난다. 이러한 쉬운 죽음은 다케시의 또 다른 영화, <HANA-BI>와는 다소 다른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인 무라카와 또한 이 죽음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HANA-BI> 속 죽음은 쉽게 말해 영웅물의 그것과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면 <소나티네>의 죽음은 가령 <존윅> 시리즈의 죽음이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느와르 속 죽음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관은 곧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

 

 다케시 감독은 <소나티네> 속 미유키의 대사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관을 강조한다. '남을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자신도 쉽게 죽을 수 있다는 뜻이겠네요.' 그리고 그러한 대사들을 맞받아치다 주인공, 무라카와는 말한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다보면 되려 죽고 싶어져.'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라카와가 한 삶의 조치는 무엇일까? 바로 피신, 휴양이다. 어째서 이렇게 예기치 못할 위협들이 도사리고 허망함이 서려있는 삶을 우리는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가? 왜 결국 무라카와는 끝내 자살하였는가? 필자는 이러한 죽음들은 곧 삶의 방향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라카와는 야쿠자 조직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선 인물이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을 청산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마 무라카와가 추구하던 삶은 오키나와에서의 피신생활처럼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이상향 속 삶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언제 암살(죽음)이 일어날 지 모르는 무방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케시가 생각하는 삶이고 죽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눈 앞에서 신임하던 부하가 무방비하게 살해당한 장면을 목격한 무라카와는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평화로이 원반던지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죽음에 대한 무력함에서 그는 그것을 수용함과 동시에 재빨리 평화로운 일상 속으로 복귀하였다. 마치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발악하듯 말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곧장 삶에 대한 충실함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삶의 태도'는 부차적인 문제고 결국 '죽음으로부터 오는 인생에 대한 염세주의'가 정확한 요약인 거 같긴 하다.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야쿠자들의 <기쿠지로의 여름>

 

 <소나티네>가 참 재밌는 이유는 다른 느와르물과는 달리 야쿠자들이 소년처럼 동심어린 놀이들을 즐기는 인간의 순수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기타노 다케시라고 한다면 연상되는 키워드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폭력성, 하나는 유머러스함. <소나티네>는 전혀 상반되는 이 두가지의 키워드를 적절하게 혼합, 배치시켜 다케시만의 건조하고 시니컬한 정서를 더욱 극대화시킨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소나티네>에서 오키나와에서의 야쿠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그들의 모습은 마치 다케시 감독의 또 다른 작품, <기쿠지로의 여름>에 등장하는 반달, 기쿠지로와 소년, 마사오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선 그들이 본격적으로 놀이를 시작한 것은 극 중 중후반에서 마사오의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이다. 물론 엄마를 찾으러 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다양한 해프닝들도 무척 낭만적이고 재밌는 장면들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마사오가 치유되고 기쿠지로도 철부지의 모습을 탈피해 더욱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그동안 있었던 이전의 삶을 벗어던지고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동심으로 돌아간 후반장면이 아니겠는가. <소나티네> 속 야쿠자들의 놀이들이 딱 그러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무라카와는 자신이 왜 야쿠자생활을 청산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반투명한 바람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자신이 행한 살인들이 또한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지금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긴다.

오키나와에서 평화로이 피신생활을 하는 장면

 

그들의 오키나와 씬들은 막연하지 않다

 

 <소나티네>에 등장하는 놀이나 여러 상황들을 되짚어보자. 놀이 중에는 러시안 룰렛, 해변가에서 구덩이 함정 만들기, 종이스모 대결, 폭죽놀이 및 전투, 원반사격 등이 있고 해프닝 중에선 구덩이에 빠진 자동차 견인, 우천 속 샤워 중 비가 그침, 공중전화이용 중 잔돈 먹힘 등이 있다. 이러한 장면들이 가지는 하나의 교집합은 바로 돌발상황과 통제불가이다. 러시안 룰렛이 가지는 아찔한 상황들이 모두 일상 속 사소한 놀이나 해프닝들로 변장, 미화된 것이다.

 

 구덩이 함정이나 우천 속 샤워, 공중전화 잔돈 씬들의 경우 예기치 못한 인생의 돌발상황들을 연상시키게 만들며 자동차 견인 장면이나 종이스모대결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비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놀이는 바로 폭죽놀이가 아닐까 싶다. 폭죽놀이를 하는 도중 실탄을 사용하는 무라카와의 반칙들은 전혀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은 사소한 일상이 실은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죽음의 상황이 잠재되어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환기시켜줌과 동시에 끊임없이 죽음을 상징하는 총의 존재를 계속해서 인식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케시 감독의 유머러스함은 그가 추구하는 영화적인 주제,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고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좋은 균형과 묘사력을 가지고 있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유머러스함과 관련해선 한국의 코미디 중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이건 지극히 유머를사용하는 도구적임이 그렇다는 것이지 완성도에 있어선 아직 다케시 감독의 그것과 견줄 수 없다 생각한다.)

 

 

왜 무라카와는 자살하였는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는 무라카와

 

 무라카와는 잠을 자다가도 러시안 룰렛에서 실수로 실탄을 넣어 자신이 자살하는 장면을 꿈꿨을 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는 모든 상황이 종결된 엔딩에서 자살을 선택했을까? 필자는 이 장면을 보며 <존 윅>이 떠올랐다. 영화 <존 윅>에서 존 윅이 끊임 없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세상은 자신이 킬러의 삶을 청산하는 것을 연신 거부했기 때문이다. 존 윅이 바라는 삶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바로 '다정한 남편(loving husband)'가 되는 것. 그리고 그는 죽음을 통해 그것을 이뤄냈고 킬러의 삶 또한 청산할 수 있었다.

 

 무라카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오키나와에서의 피신생활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었는데 끊임 없이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고 암살자가 방문하는 등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사주하고 배신한 것은 자신이 신뢰하던 조직의 보스였다. 피에는 피로 갚는 야쿠자의 전쟁에서 그는 도망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고 결국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소나티네> 포스터가 의미하는 것

 

 무라카와는 삶의 허망함과 무력함을 지속적으로 느껴온 인물이다. 어느 정도는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도 없지 않아보이는데 처음으로 극 중 사람이 죽는 마작 사장 물고문 장면을 떠올려 보자. 무라카와는 부하에게 묻는다. '물 속에서 몇 분 정도를 버틸 수 있을까?' '2~3분 정도일 겁니다.' '그래? 2분 정도 담궈봐.' 그리고 마작 사장이 2분을 버티자 3분 동안 담구라는 지시를 내려 그를 살해한다.

 

소나티네 포스터의 생선작살

 

 포스터 속 물고기는 큰양놀래기(나폴레옹 피쉬)라는 생선인데 작살에 꽂힌 채 물 밖으로 나와있는 모습은 마치 마작 사장이 몸이 묶인 채 크레인에 매달려 물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물고기에게 작살을 꽂은 작자가 인간이듯 마작 사장을 물고문 시킨 것은 무라카와이다. 이 생선은 포스터 뿐만 아니라 영화의 시작 인서트 장면에서 등장하여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천천히 풀샷으로 전환된다. 마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주로 사용하는 영화 시작부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저 생선을 무라카와라고 생각하고 가해자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해보자. 저 물고기는 과연 작살에 꽂힌 상태로 얼만큼 버틸 수 있을까? 2분? 3분? 그렇다면 무라카와는 언제 급습할 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동반되는 인생의 허망함, 염세적인 감정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그래서 무라카와의 죽음은 예견된 결말이었을 지 모르겠다.

 


 

▶소감

 

 기타노 다케시는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사실 그런 거 상관안하고 작품 그 자체만 보는 성향이긴 하다. 찾아보니까 그가 이런 허무함과 죽음 같은 소재를 다루는 이유가 자신이 죽을 고비를 한번 겪은 이 후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소나티네>도 좋지만 사실 이건 예술영화적인 성격이 강해서 이런 주제에 친숙하지 않으면 와닿는 것도 없을 수 있다. 오히려 대중적이면서도 청춘들에게 임팩트있는 영화는 <키즈 리턴>이 아닐까?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건 당연히 <기쿠지로의 여름>일테고. 최근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가 선호하는 영화적인 재미가 상당히 변화된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지루해 할 만한 걸 나는 재밌어한다던지. 누군가는 이 <소나티네>가 지루할 수도 있고 어이없을 수도 있을테니 뭔가 세상이 야속하다... 하지만 내 친구가 재미있어 할 영화를 나는 지루해 한 적이 원체 많아놓으니 이해는 한다. 왜 이 재미라는 감정은 야속하게도 통일되지 않을까. 모두를 만족시키긴 참 어려운 거 같다.

 

 이야기가 잠시 샌 거 같은데 원래 소감은 이야기 새면서 하긴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느와르에는 두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업적인 죽음, 하나는 감정적인 죽음. 기타노 다케시의 죽음은 어디에 속할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죽음을 취한 역설적인 죽음은 당연히 감정적인 죽음에 속할 지도 모르지만 무라카와와 같은 사이코패스적인 성격에 냉혈한이면 스스로에게 처한 난공불락의 상황이 못마땅해서 자신을 마작 사장 죽이듯 죽였을 지도 모르겠다. <키즈 리턴>도 그렇고 <HANA-BI>도 그렇고 이번 <소나티네>도 그렇고 주인공이 스스로 자신의 결말을 알면서도 비극을 선택하는 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특징인 거 같다. '기타노 블루'가 끌릴 때 쯤에 언젠가 그의 느와르를 한 편 더 볼 것 같다만 그게 언제가 될까. <HANA-BI>를 보고 반년 언저리가 되서야 <소나티네>를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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