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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hort film

<우주의 닭> - 변성빈

by 대담한도약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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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이해하는 자는 사랑하고 주목하고 관심을 가진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서를 통해 올바른 사랑이란 ‘제휴’나거래’를 하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과연 <우주의 닭>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랑을 어떻게 행하는가? 작품 속에는 크게 총 세가지 부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다운 증후군의 ‘우주’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사랑.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점박이는 충분한 관심을 가진 사랑. 아이들을 향한 선생님의 차별없는 사랑. 나는 이 작품에서 우주와 선생님의 사랑 앞서 말한 파라켈수스와 에리히 프롬 지향하는 사랑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우주’라는 인물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이 좋아하는 삼계탕을 위해 살아있는 닭을 선물로 가져온다. 교실은 혼비백산이 되고 아이들은 우주가 가져온 선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주는 자신의 사랑이 거부되었다고 생각하고 닭을 겨냥했던 커터칼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간다. 우주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의 사랑과 등가교환 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선생님의 경우 다운 증후군의 아이를 여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하려는 노력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파라켈수스가 언급했던 딸기와 포도의 경우에 적용되는 충분한 이해와 관심이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들의 사랑은 어떠해야 했을까? 점박이처럼 충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이야기는 완벽해질까? 

우주의 닭 스틸컷

 우주는 닭이 새지만 날지 못하기에 병신 다며 싫다고 말하였다. 닭은 장애인이지만 똑같이 일반인들과 섞여 살아가는 우주와 유사한 교집합이 존재한다. 감독이 서툰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를 장애아로 설정한 것은 분명 ‘닭이 새이 듯이 장애인 또한 똑같은 인간이며 그들의 감정 또한 그러하다.’ 라고 말하고 싶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은 우주의 서툰 감정을 핸드헬드 기법으로 극대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이 릴려면 우주는 서툰 표현을 했을지 언정 그 의도 또한 서툴어서는 안됐다. 자신의 사랑이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자해를 시도하려고 하는 등가교환 실패의 울분은 장애인을 옹호하기는 커녕 그들의 사랑은 역시나 위태로웠다고 입증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 작품이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선 우주의 사랑을 표현할 때 서툴다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혹은 선생의 착오적인 교육방침을 비판해야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작품은 선생님의 그릇된 행동을 비판하려는 것 같은 모션을 취한다. 가령 우주는 반장과 선생님이 자신의 등 뒤를 덮치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고 관객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행동을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서스펜스 요소를 첨가한 것은 어떤 의도였는가? 필자는 이러한 관점을 빗대어 보았을 때 선생님의 착오적인 사랑에는 점박이의 사랑의 기반이 되었던 관심이 결핍되었다고 보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선물이란 상대방이 갖고 싶은 것을 주어야 하기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충분한 관심은 커녕 장애아에게 타 학생과 똑같은 머리핀을 선물해주었다. 우주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이유는 등가교환 실패의 울분도 있었겠으나 선생님의 착오적인 관심이 들통난 것도 포함된다. 선생님의 관심이 그릇됐다는 비판은 작품 속에서 컷어웨이 장면으로 짓밟혀 부숴진 머리핀 우주의 닭, 노래를 부르는 점박이의 얼굴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두 개의 잘못된 사랑을 건너 올바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사랑의 모습은 점박이의 모습일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향하는 비판인가? 서툴고 등가교환적인 의도를 지닌 우주? 혹은 친절하지만 착오적인 사랑을 하는 선생님? 점박이가 우주를 덮치려는 선생과 반장을 제압한 뒤 직접 우주를 설득하려는 모습은 분명 사랑의 핵심인 관심이 전제된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우주 점박이의 사랑을 보고 자해를 포기하고 웃어 이는 까닭은 선생님에게 돌려받지 못한 사랑을 점박이의 사랑으로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우주가 점박이의 올바른 사랑을 보고 배워야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서툴기는 하되 방향성만큼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가 고쳐 나갈 ‘제휴’와거래’를 향한 욕망은 그 누구도 고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점박이의 사랑은 그것이 선생을 향한 비판이라고 보았을 때 주제는 나름의 방향성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은 점박이처럼 행동할 수 없다. 각자의 사정과 입장이 다른 것이다. 점박이만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 또한 외적으로 일반인들과는 차별점을 가지고 있어서. 즉 공감이 된다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굳이 우주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인물을 점박이로 설정할 필욘없다. 결국 장애가 없는 선생님은 우주나 점박이 같은 특수 아동들의 행위를 이해는 하되 공감할 순 없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일반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작품은 점박이의 행위를 통해 올바른 사랑을 표방하였지만 우주에게도 선생에게도 교실 속 학생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없다는 아쉬움만 남는다. 앞서 말했 이 이 작품이 올바른 방향성을 지니기 위해선 선생님은 차라리 선물을 주어선 안됐고 우주는 울분에 빠져 자해 시도를 해서는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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