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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O-ne sentence review

<소리도 없이> - 홍의정

by 대담한도약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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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2020)

요즘은 비극이란게 참 고전의 가이드를 벗어난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가령 <오이디푸스 왕>같은 경우를 예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란 고매한 자가 예상치 못한 운명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비참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소리도 없이>는 요즘의 비극들은 주인공들이 그닥 고매하게 나오지 않는다. 권선징악의 규칙이라도 따르 듯이 비참한 자가 고매하게 될려고 할 참에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최근에 본 <아네뜨>(2021)도 그러한데 나중에 <아네뜨>도 글을 써볼까 한다. 아무쪼록 <소리도 없이>는 한국고전동화의 권선징악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이 유괴범이라는 점에서 마치 우리나라의 「별주부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시체처리인부를 하고 있는 두 인물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부끄럼도 없으며 죄책감도 없는 인물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며 시체를 묻으며 그들에게 예의를 차려주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만 이 자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거 같다. 그들에게 시체처리란 단지 조금 찝찝한 직업에 불과하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진 유괴된 아이는 멀끔히 자란 초등학생이다. 손에 더러운 것 한번 안만지고 자랐을만한 아이를 조치하는 것은 성인남성을 밧줄로 매달아 놓는 것보다 그들에겐 고역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비범한 행동력과 뻔뻔함을 가졌으니 홍의정 감독판 별주부전은 그렇게 시작된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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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주연 중에선 그 누구도 악역도 선역도 없다는 점이다. 단지 모두가 치열할 뿐인데, 앞서 말했다시피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은 생계수단이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살인에 개입하지 않고 다만 세팅할 뿐이다. 이들이 잘못한 것이라곤 살인과 유괴 등을 방조한 것 뿐이다. 이들이 어떻게 이 직업을 택했는지는 모르나 선하고 고단해보이는 이들의 삶을 모욕하기란 그리 쉽진 않다. 창복은 나이든열렬한 가톨릭 신자이며 태인은 말 한마디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괴된 아이 초희(문승아)가 어떠한지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약자들의 시나리오를 보고있노라면 창복 배역의 경우는 오히려 더 연로한 노인으로 설정하는 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이 초희를 처음 데려갔을 때 초희는 토끼가면을 쓰고 있다. 마치 자라가 용왕에게 간을 바치기 위해 토끼를 찾아낸 것처럼 토끼가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들은 토끼의 간을 빼낼 의도가 없다. 약자들의 치열한 생존을 말하기 위해선 결코 악인은 존재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약자들에겐 그럴 용기와 배짱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토끼간을 빼내는 것은 다른 자라에게 빨리 넘기고 싶어한다.

 

 초희는 이 영화에서 단 네번 도움을 구한다. 처음 태인에게 맡겨졌을 때 동네 할머니에게, 술 취한 경찰에게, 태인에게, 초등학교 담임선생에게, 이렇게 네 번이다. 그녀가 행한 모든 외침은 태인과 관객에겐 돌발행동이다. 초희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 앞에선 완전복종하며, 되려 스톡홀름 증후군이 발병하여 함께 범죄현장을 방조하기 때문이다. 초희는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으로 꽃을 그리기까지 하며 여경을 매장시키는 것을 마치 소꿉놀이마냥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녀의 행동판단근거는 단지 하나이다. 현재 상황에서 저 자가 자신이 빌붙을만한 가장 강한 인물인가? 이 하나로 태인은 적이 되기도 가족이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런 다짐은 첫 외침에서 할머니에게 구조받지 못하고 태인의 집에 오래 감금되었을 때, 집 청소를 해야겠다 다짐하며 발생했을 것이다. 

 

 필자의 의문점은 과연 초희의 배신에 과연 미련과 옛정은 없었을까? 라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배신했을 때와는 다르게 태인이 초희를 배신하고 닭집에 팔아넘겼을 땐 초희는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또 한번 버려졌다는 충격과 배신감에 뒤늦게 맘이 변한 태인의 구조를 몸부림치며 저항하기도 했다. 허나 그녀의 배신은 칼같이 그어져 그녀의 눈에는 냉철함과 절박함만 보인다.

 

늙은 할머니 -> 술취한 경찰 아저씨(의심) -> 범죄자 태인 -> 담임선생님

 

 위처럼 이어진 그녀의 환승테크에 태인이 세번째에 있다는 점은 꽤 흥미롭게도 느껴진다. 소통안되는 할머니보단 술취한 아저씨가 듬직하고 의심스러운 아저씨보단 범죄자지만 가족같은 태인이 듬직하고 범죄자보단 담임선생님이 듬직했던 것이다. 허나 그녀가 닭집에 팔려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범죄자지만 가족같은 태인보다 그 심성이 악해보였기에 더 열악한 곳으로 가기 싫었던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실상 태인과 다르지 않은 욕구이다. 태인 또한 현재는 시체처리를 하고 있지만 정장을 입고 멋지고 당당한 삶을 살기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다만 초희가 더 영리했다.

 

 태인은 나아가지 못하고 초희가 나아갈 수 있었던 점은 자신의 환경을 바꿀려고 했는가 라는 의지에서 나타난다. 태인은 자신의 벙어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도 절대 창복이 준 목사님의 테이프를 재생해보지 않았다.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너져가는 집에 빨래더미와 청소더미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은 태인 남매의 무기력함을 대표하고 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그와 달리 초희는 그런 절망적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탐색하고 행동하는 아이었다. 그렇기에 깨끗히 집을 청소하였던 것이다. 단지 태인의 환심을 살려고 했을 순 있으나 초희에게 그런 적응력과 진취성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깨끗한 집에서 초희와 함께 생활하며 태인은 서서히 변화한다. 조폭시체에서 몰래 빼돌린 정장을 입고선 초희와 함께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다짐한다. 그 때부터 태인은 벙어리를 고치기 위해 창복이 준 테이프를 자기 전에 꼭 들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우리는 태인와 초희의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초희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유괴당해도 외면당한 것이 비춰져왔기에 약자들끼리 연대하여 가족을 구성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토끼가 결국 육지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권선징악을 비극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악한자가 벌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인은 토끼의 간을 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바다로 끌려간 토끼를 자의적으로 육지로 데려와 등교시킨다. 만일 태인이 창복처럼 초희를 버렸더라면 창복처럼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머리통이 깨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초희를 구해주었기에 천벌을 피한 것이다.

 

 이 영화가 권선징악을 모티브로 하지만 우리가 통쾌함 대신에 비극으로 인식하는 것은 태인의 본성은 선하다고 연출적으로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무엇에 우리는 태인을 고매한 자, 혹은 범인(凡人)으로 인식했는가? 태인과 우리는 닮아있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때론 피를 묻히기도 하고 방조하기도 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어쩌면 태인은 관객 모두의 분신이 될 수 있다. 또한 초희 또한 관객의 분신이 될 수 있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방조하고 배신하고 환승해온 경험이 한번쯤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하고 최선을 선택하지 못해 차선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쉽사리 본인들의 분신같은 태인과 초희를 나무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사라진 것은 유아인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이 영화 속엔 어떠한 정의감이나 명예, 도덕같은 낭만은 찾아볼 수 없다. 태인과 창복이 시체처리하는 것도, 조폭두목이 부하들에게 배신당하는 것도, 초희가 수없이 배신하고 환승하는 것도, 태인과 창복이 초희를 받아오고 버리려는 것, 태인이 되찾아오고 초등학교에 등교시키는 것도 인물들의 그 모든 행동에서 일말의 도덕성이나 도리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발버둥친 현재, 그리고 결과일 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태인은 그 많은 유괴된 아이 중에서 초희만 빼고선 모조리 그 버스 안에 냅둔 채 버려두고 온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말이다. <소리도 없이>에서 소리는 도덕, 혹은 정의 그따위로 바꾸어도 괜찮을 듯하다. <소리도 없이>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치기 위해선 그 어떤 행동도 암묵적으로 인정해주고 납득해버리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태인이 벙어리인 것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하다. 초희의 배신이 소리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볼 수 있다만 더 큰 대목에서 소리는 생존에 필요하지 않는 사사로운 도덕성과 감정들을 말하면 적절할 듯하다.


▶소감

 

 한국영화 중에서 정말 이렇게 신선한 소재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재밌게 봤다. 기본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권선징악을 비극으로 이끌어내는 유려한 변곡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 중에서도 이 변곡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분신들이 만들어낸 소름돋는 일상이라는 것이 가장 대단했다. 세상에는 권선징악이 존재한다지만 그것이 마냥 완벽하지도 않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율배반적인 현상이라서 비현실적인 소재에서 가장 현실적인 결과를 도출해낸 것.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 또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올까?

 

 

▶한줄평

 

 

토끼가 지닌 총명함에 별주부전같은 교활함까지 지니니 여우라 불러도 되겠다.

뛰어난 용왕이 아니면 자라도 굳이 토끼의 간을 탐하지 않는다. (11/10)

 

 

▶별점 :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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