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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2) - 루벤 웨스틀룬드 (계급 피라미드는 슬픈 모래시계 속 알갱이와 같다.)

by 대담한도약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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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2023) 포스터

 

 <슬픔의 삼각형>은 2022년, 작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됐던 작품이기도 한데 필자는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다크 글래시스>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미래의 범죄>만 예매 성공을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당시에 접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당시 지인들의 관람평을 들어보면 <슬픔의 삼각형>은 내용이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자 2편이 좋다니 3편이 더 좋다니 1편은 굳이 왜 있는 지 모르겠다니, 엔딩이 이상하다니 등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3부작은 삼각형의 모서리 갯수와 관련이 있으며 무인도에 표류되는 이야기는 21년도에 개봉했던 <올드>와 컨셉적인 측면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는 줄 알았다. <올드>? 몰입도 안되는 작위적인 연출과 전개로 욕을 진탕먹었던 작품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 당시엔 부국영에서 <슬픔의 삼각형> 예매를 놓친 것에 그리 아쉬움이 없었다. 당시엔 말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슬픔의 삼각형>은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평론가들과 시네필들의 긍정적 평가를 점점 쌓아갔고 심지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다. 호불호가 강할 수 있다곤 하나 필자의 경우 그러한 영화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는 취향을 가지고 있고 특히 블랙코미디 작품을 굉장히 굉장히 좋아해서 이번에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곤 꼭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름 기대를 품고 극장으로 향한 나는 약 150분의 러닝타임 동안 대부분을 끊임없이 실소해대며 관람했다. (블랙코미디 장르를 대하는데 있어 실소가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오는 것은 그 장르에게 엄청난 극찬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해리슨 디킨슨의 칼 역

 

 관람객의 입장으로 평가해보면 이 영화는 객관적으로 봐도 나름 호불호가 있을 법한 내용의 작품이긴 하지만 작년 75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만큼 작품성 하나는 공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슬픔의 삼각형>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무기는 인류의 계급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를 하는 데 있어 가히 빈틈없이 완벽한 쌍방 밸런스를 맞추었다는 점과 중간 중간 시선을 강탈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미장센들이 아닌가 싶은데 스타일도 내 스타일, 연출력도 미쳤고 150분을 가득 채우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전개와 풍부함 모두 좋은데 솔직히 나는 5점만점의 5점은 아닌 4.5점을 주고 싶다. <슬픔의 삼각형은> 작품성도 좋고, 개인 취향에도 딱 들어맞음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주지 못한 이유는 나름 쪼잔하고 줏대없다고 느낄 법한 것인데, 이 영화는 사람의 형상으로 비유하자면 머리에 핏대를 잔뜩 세운 채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증기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블랙 코미디란 사람을 뜨겁게 만들기 보단 오히려 차갑게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자에 속한다. 그리고 필자가 본 작품 중 전자에 속하는 블랙 코미디는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과 <빅 쇼트> 등이 있다. (필자가 5점만점을 준 블랙 코미디 작품으로는 <게임의 규칙>과 <시계 태엽 오렌지>, <파이트 클럽>, <존 말코비치 되기> 정도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정도가 필자의 철학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한다.)

 

 엄청 오랜만에 포스팅이라 서론이 길었는데 본격적이고 간략하게 <슬픔의 삼각형>에 대한 소감과 분석을 말하고자 한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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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 1부 스틸컷

 

 이 영화는 발렌시아가와 H&M, 거만과 낙천이 뒤섞이고 낙관과 냉소라는 조합될 수 없는 단어들이 낙관적 냉소주의라는 역설적인 문구로 합쳐져 런웨이를 진행시킨다. 결국 그런 양극적인 단어들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혼돈과 혼란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 본성을 마주시키며 진정되고 고요함을 가지게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허무주의, 냉소주의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이 뜨거운 위태로움은 관객이 자기 스스로를 성찰해보게 하고 오만함을 피드백까지 도달시킨다. 이게 무슨 말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시퀀스 분할에 대한 이야기를 끝 마치고 마지막에 하고자 한다.

 

 얘기하기에 앞서 이건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 영화는 인물들 각각의 캐릭터성이 대표성을 띄고 있으며 내용은 아주 도발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필자의 블로그는 사회 현상을 논하는 포스팅을 안하니까 <슬픔의 삼각형> 속 영화적 상황이 보편적인가에 대한 진위는 배제하고 말하겠다.

 

옴니버스도 아니고 연극 형태도 아니면서 왜 시퀀스를 나누었나?

 

 이 영화에서 평등함은 상당히 직관적이며 날 것이다. 1,2,3부는 공통된 인물들이 등장하여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때문에 이론적으론 옴니버스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연출 스타일을 보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본성들의 시사는 영화적 상황이 부여하는 개연성보단 현재 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힘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옴니버스라 생각하고 보는 시각도 재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 감독이 <슬픔의 삼각형>을 굳이 1,2,3부를 나뉘어 진행시킨 것은 오히려 테마의 구분을 조금 더 명확히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담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테마는 인류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데, 마치 최초의 인류, 아담과 이브가 기원이 되었 듯 1부는 남 녀의 이야기, 2부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 3부는 원시 사회로 회귀한 어쩌면 미래의 사회의 테마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야야&칼 커플

 

1부 : 사자와 같은 커플

 

 1부의 경우 비교적 가장 미시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아무리 성별적인 관점이 개선되었다곤 하나 남녀의 수입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남성이 여성보다 비교적 높게 말이다. 그래서 감독은 그 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여성 모델의 수입 1/3을 받는 남성 모델, 칼이 여친 야야에게 불만 가득해 하는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감독은 여성이 남성을 대하는 태도는 남녀 수입과 무관한 본성 혹은 오랫동안 굳혀 온 습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남녀 수입 차이가 데이트 비용 지출 비중과 무관하다는 것인데, 철학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물질적 토대가 관념을 결정하는 유물론적 관점을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이들의 관계는 야생 사자들의 암수 역할과 일부 흡사하다. 사자는 암컷이 사냥과 육아를 대부분 전담하고 남성은 우월한 완력을 바탕으로 프라이드(무리) 보호를 중점적으로 전담하기 때문이다. 대신 사자 무리가 수컷에 대한 존중이 있고 인정이 있다고 한다면 야야와 칼의 관계에서는 그런 게 없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부를 떠나 부실한 근거를 통해 오점을 드러내는 주제 전달은 영화적 연출보단 정치적인 스킬에 적합하지 않나?)

 

슬픔의 삼각형 2부 스틸컷

 

2부 : 현대 사회는 악천후의 항해

 

 장 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규칙>이 저택을,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이 호텔을 특정 사회의 축소판으로 사용했 듯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요트를 현대 계급 사회 축소판으로 사용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역시 우디 해럴슨 배우가 연기한 선장 역이 공산주의자라는 점일 텐데 일단 전반적으로 작품의 뉘앙스를 보았을 때 감독은 그다지 마르크스주의자까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공산주의자인 선장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로 설정하였다고 느꼈으며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지만 필자는 모터로 돌아가는 요트에서 계속 돛 타령을 하는 러시아 진상 승객의 태도는 마치 산업시대 도래와 혁명의 흐름을 파악, 수용하지 못하는 귀족들의 오만함을 시사했다고 생각했다.

 

 선장 만찬에서부터 '러시아' 자본주의 똥팔이 중년과 공산주의 선장이 술을 마시고 방송을 하는 장면은 정말 블랙 코미디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마르크스와 레닌의 인용문을 방송 마이크로 함께 조잘대며 승객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데 이것은 마치 20세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부터 냉전 시대 때까지의 역사를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2부의 엔딩 장면은 해적이 요트를 습격하며 던진 수류탄이 그것을 제조한 폭발물 사업가 부부에게 떨어지며 폭발하는 것인데 이 장면은 선장과 똥팔이 중년이 대화하며 언급한 '자본가들은 우리가 그들을 교수대에 매달을 밧줄을 판매한다.' 라는 레닌의 인용문과 매치된다.

 

<슬픔의 삼각형> 3부 스틸컷

 3부 : 역사는 종말이 아니라 회귀할 것이다. (엔딩 장면 분석, 해석)

 

 헤겔의 변증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현상이란 '정'과 '반'이 충돌하여' 합'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위태로운 요트(정)를 해적(반)이 침략하여 해적과 다양한 계급들이 함께 무인도에 표류된 것(합)처럼 말이다. 웨스틀룬드는 앞으로 벌어질 미래 사회를 원시회귀로 보았던 것일까, 요트 다음으로 무인도를 미래 사회 축소판으로 이용하였다. 사실 2부의 경우, 이야기에서 주인공, 야야와 칼의 비중이가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인류의 기원(1부)과 부족의 형성(3부)은 그다지 먼 역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3부는 1부에서 하다 못한 논제의 연장선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엔딩 장면의 잡상인과 리조트 엘레베이터 때문에 관객들이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도 그랬다. 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선 차라리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의 외계 비석처럼 완전히 메타포 비유 덩어리 장면으로 보는 것이 편하다. 앞서 말했 듯 3부, 무인도 편은 현대 사회가 몰락했다는 가정 하에 일어난 인류의 원시 회귀 상황이다. 리조트가 실존하는 것이라면 신호탄을 쏘았을 때 바로 구조팀이 왔을 것이고 애초에 요트가 습격당해 박살이 났을 때도 대응팀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니 리조트의 엘레베이터는 야야와 에비게일이 실제로 엘레베이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 인류는 또 다시 원시에서 현대로 재귀했다는 가정 하에 인류 역사의 발전을 메타포를 통해 간략하게 장면화시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야야가 에비게일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비서로 고용할 것을 보장해주겠다고 한 것 또한 계급의 피라미드는 언제나 고정되지 않고 역사에 따라 뒤섞이거나 반전되는 등,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 같다고 주장한 감독의 의미심장한 대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중간에 칼이 야야와 에비게일을 쫒아 숲 속에서 질주하는 평행편집 장면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세 가지 가능성을 보았다. 첫째, 창남처럼 사는 무인도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야야와 진작에 발견해놨던 엘레베이터를 타러 갔다. 둘째, 에비게일의 옆에서 무인도 2인자 행세를 하는 것이 좋아서 야야의 입을 단속시키러 갔다. 셋째, 야야 혹은 에비게일 중 둘 중 하나가 다툼 끝에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재하러 갔다. 정도이다. 아마 가장 신빙성있는 것은 셋째, 다툼을 중재하러 갔다 일 것 같은데 누구의 편에 서서 중재를 할 것인가는 열린 결말 아니겠는가, 에비게일이 야야를 돌로 내려칠 지도, 혹은 비서로 고용되어 조금이나마 신분상승을 할 지, 무슨 결정을 하려고 했던 칼이 그 곳에 도착해 상황 자체가 무마될 지는 열린 결말인 것이다. 글쎄다. 감독은 어떤 결말을 생각해둔 것일까?

 

 (독일 언어 장애인이 흑인 잡상인을 만난 장면은 엘레베이터만큼 중요한 장면은 아니다. 엘레베이터가 실존하는 것인지 환각인지,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한 빌드업을 하기 위함이 1차 목적인 것 같고, 다음으론 브루주아들 또한 결국엔 명예욕보단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 성욕이 우선된다는 것을 시사한 블랙 코미디적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피라미드가 슬픈 이유

 

 이 영화는 2,3부가 변증법이 적용된다는 점, 에비게일을 대하는 승객들과 승무원의 태도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조라는 점에선 마르크스의 이론이 적용되지만 1부의 행태를 보면 부분적으론 찌질하게 유물론을 일부 부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임금과 창부 등 남녀의 역할이 반전되고, 계급이 반전되는 등 이 영화는 상황을 엎어버리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엎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악천후 속 요트 같은 영화에서 가장 충실하게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본성 뿐이다. 그러니 관객은 자신의 내면 안에 똑같이 존재하는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볼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만인은 이 본성 속에서 평등해진다. 이 얼마나 허무하면서도 겸손해지는 결론인지. 슬픔의 피라미드는 이렇게 그늘지는 것이다.

 

 

 마무리 및 소감

 

 나는 예비군을 같이 다녀온 형님 두 명과 함께 봤었는데 보는 내내 실소를 감추질 못했다. 어떤 의미의 실소인지는 모르겠다만 한 분은 예술 영화 첫 도전이었던 지라 블랙 코미디의 매운 맛이 어질어질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1,2,3부 중에서 3부가 가장 영화다운 시퀀스였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1부는 '영화적 전개'보단 감독의 '소신 발언'에 가까운 연출이었고 2부는 상황 자체가 너무 극적인 나머지 몰입보단 납득으로 봐야 하는 '상황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3부는 비교적 강하게 몰입됐다. 본성 앞에서 드러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전개였고 피라미드가 무너지고 재정립된 가장 의미있는 시퀀스이기 때문이었다.

 

 찰비 딘 배우가 참 배역을 소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급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보면서 안나 카리나 배우와 외적으로 뭔가 닮은 느낌이 있었는데 안타깝다.

 

 

별점 : ★★★★☆

 

한줄 평 : 계급의 피라미드는 본성 아래 평등한 모래시계 속 모래 알과 같은 것이다.

 

 

 

·비슷한 스타일 영화 추천

- 요로고스 란티모스 감독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더 랍스터>, 아담 맥 케이 감독 <돈 룩 업>

 

·무인도 표류 영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캐스트 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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