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파벨만스>는 그 작품성에서나 감독의 네임드를 고려해봤을 때 영화관에서 너무 빨리 종영되고 있는 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상영 기간에 올리는 것도 아니고 포스팅 시기도 많이 늦었고 했으니 이전 같은 분석글보단 짧게 엔딩과 관련한 개인적 소감 정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의 경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여태 <A.I>를 가장 재밌게 보았고 최고작으로 뽑는 사람 중 1명인데 솔직히 이번 <파벨만스>가 그에 견주거나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의 소재 자체가 블록버스터거나 흥미로움이 있는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이야기 서술과 연출이 각각의 시퀀스와 씬마다 무척이나 막강한 유기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선 그러한 촘촘한 짜임새를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감탄과 쾌감이 느껴졌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버무러져서 그런지 몰입감도 상당히 높았지 않았나 싶다.
위의 <파벨만스> 포스터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피사체는 역광을 받아 그림자가 졌고 주변 또한 어두운 조명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그라운드의 밝은 하늘과 당찬 주인공의 걸음걸이를 보면 절망보단 희망이 느껴지는 엔딩씬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족인 파벨만스네는 단 한명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않았다. 주인공인 새미는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함에도 아버지의 만류로 인해 영화가 아닌 과로 대학을 진학하였고 엄마인 미치는 정신병에 걸린 이혼녀, 아버지 폴은 고독한 이혼남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이 영화의 엔딩에서 새미 파벨만은 웃었는가?
(스포 주의)
삶을 관조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극단적으로 긍정(희망)과 부정(절망)으로 그 태도를 분류하자면 주인공 새미는 불우한 가정사와 학교생활, 진로적인 상태를 고려해봤을 때 결코 삶을 희망적이게 바라보진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존 포드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존 포드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찾아 온 새미에게 자신의 작품 사진 중 두 장을 지목하며 보이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 새미는 존 포드 감독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진 속 인물들의 행동과 시선 등을 열심히 분석하여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존 포드 감독은 그저 지평선의 위치, 단 한 가지만을 묻는다.
지평선은 아래에 있어도, 위에 있어도 흥미롭지만 중간에 있으면 더럽게 재미없는 거야!
존 포드는 저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가 설명하지 않고 새미에게 이제 꺼지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새미는 처음엔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 후 조용하고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당차고 희망에 찬 걸음을 나아가는데 새미 마저 관객에게 존 포드의 말 뜻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도대체 지평선은 무슨 뜻이고 위 아래 중간은 또 무슨 뜻일까?아마 <파벨만스>를 재밌게 본 관객이라면 새미의 탁한 눈동자에 빛을 불어넣어준 저 조언의 참 뜻을 헤아리기 위해 기분좋은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저 대사에 대해 정확한 정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누군가는 영화 촬영 구도에 대한 조언, 영화나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조언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런 해석도 좋고 적용이 가능하지만 필자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조금 더 거시적이라고 해야할 지, 소박하다고 할지, 지평선에 대한 저 조언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조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새미가 헤아린 뜻과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생이 된 새미를 가장 방황하게 만든 것은 더 나은 예술과 영화에 대한 고뇌가 아니었다. 정말 영화를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말대로 영화를 취미로만 삼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갈등이 문제였다. 극 중 새미는 심리적 준거 집단은 영화에 있지만 소속 집단이 타 과에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이것을 프레임 속 지평선으로 비유하자면 새미의 지평선은 위도 아래도 아닌 정중앙, 즉 더럽게 재미없는 위치에 그 동안 배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새미는 존 포드 감독의 조언을 자신의 지평선, 즉 위 또는 아래를 정확히 선택해 삶의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인생 조언으로 받아들였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엔딩 장면 스틸컷을 보며 영화 속 엔딩 장면을 상기시켜보자. 존 포드의 사무실을 나온 새미를 카메라가 비춘다. 어중간한 중앙에 지평선을 둔 채로 말이다. 만일 그 상태로 앵글이 전환돼 지평선이 위로 걸쳤다면 밝은 하늘은 사라지고 새미를 가두는 건물의 벽들이 강한 압박감과 그림자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영화에선 지평선을 완전히 아래로 깔아버리는 앵글을 선택했고 밝은 하늘과 햇빛의 비중을 높여 희망찬 엔딩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영화 속에선 파벨만 가족들에게 수 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나온다. 우선 새미의 아버지, 버트 파벨만을 먼저 보자.
버트는 작품 초반에 피닉스에 위치한 회사의 인사과로 이직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절친이자 동료인 베니를 함께 데려갈지 두고 갈지를 고민하고 아내의 잔소리에 결국 베니도 함께 데려가는 것을 선택한다. (아마 이 때부터 자신의 아내 미치와 베니가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것을 짐작하고 베니를 두고 가고 싶어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작품 중반에 애리조나에 위치한 IBM 회사에 헤드헌팅을 받게 되어 또 다시 이직 갈등에 놓이게 되는데 이 이직 제안을 수락하는 것은 곧 더 나은 벌이와 자아성취감을 약속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베니와의 작별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버트는 베니와 작별하는 것을 택한다. 버트는 이야기 진행 중 내내 더 나은 회사와의 계약, 가족에 대한 사랑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미의 어머니, 미치의 경우를 보면 피아니스트이기에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설거지나 일부 집안일을 사리는 등 손을 아끼는 모습을 지독하게 보여주며 베니에 대한 사랑을 꿋꿋이 고수하는 모습 또한 보인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행동과 마음을 남편에게 고백함으로써 작품의 끝에선 남편과 이혼에 대해 논하게 되고 그 순간까지도 미치는 결국 베니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리조나 학교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주인공 새미의 여자친구였던 모니카는 유대인 남친에게까지 예수님을 전도하는 신념을 보여주었고 학교에서 클라우디아와 레지라는 여학우들에게 양다리를 걸친 로건은 졸업식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며 결국 레지, 한 여자에게 완전하게 마음을 전념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건과 미치 파벨만은 작 중 두 이성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새미에게 폭력을 행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 새미는 어떠한가? 유대인의 신념을 모니카 때문에 쉽게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의 대한 진로적 신념도 견고하지 못해 자주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수 많은 충돌과 갈등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지상 최대의 쇼>의 기차 충돌씬, 새미가 만든 서부극과 전쟁 영화의 총격전, 버트, 미치, 베니의 삼각 관계, 로건, 클라우디아, 레지의 삼각관계, 미치와 새미의 감정적 충돌 장면, 모니카와 새미의 갈등 장면, 영화와 인생이 과연 그렇게 다르다고 볼 수 있는가? 영화는 언제나 스스로 선택지를 던져두고 고뇌하고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 <인셉션>과 같이 마냥 열린 결말의 작품이라고 한들 그것에서 조차도 감독에게는 따로 결정해둔 하나의 결말이 구상되어있다. 어중간한 선택은 어중간한 영화, 인생을 만드는 법이다.
짧은 소감이라고 해놓고 좀 길게 쓴 거 같긴 한데 이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가지의 영화 명대사를 소개하고 끝내고자 한다. 애리조나에서 베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심리 치료를 받는 미치는 원숭이를 입양한다. 그리고 원숭이와 함께 하는 가족 저녁 식사에서 말한다.
원숭이들은 무언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깨달았지만
정작 그걸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 같아.
맞아. 평정심이야.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라니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니 이런 건 사실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고 실천하자고 하면 또 그런게 어려우니까 갈등상황이지 않나. 잘 생각해보면 <파벨만스> 영화 초반에 뜬금 없이 새미의 동네에 마치 <시리어스 맨>의 엔딩 장면 마냥 허리케인이 나오던 장면이 나왔던 걸 기억날 것이다. 그런 갈등과 충돌의 순간, 인생이 고뇌로 가득찼을 때 우리는 가끔 마치 우리가 신으로부터 가두어져 농락 당하는 유인원이 된 것 같은 비참함을 느끼곤 한다.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유인원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평정심을 항상 유지한다고 한다. 갈등 상황에서 선택 장애가 안걸릴 순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한들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꽤 괜찮지 않을까?
별점 : ★★★★★
움직이는 건 지평선이 아니라 카메라다.
※ 스필버그 감독 영화 추천 : <캐치 미 이프 유 캔>, <A.I>, <쉰들러 리스트>
※ 주제 관련 추천 영화 : <시리어스 맨>(코웬 형제), <졸업>(마이클 니콜스),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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