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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トニー滝谷, 2004) - 이치가와 준 (고독과 허무함을 피할 수 없는 사람 본연에 대하여)

by 대담한도약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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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 - 이치카와 준 포스

 

 무라마키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76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23년 4월 2일 내가 좋아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가가 세상을 떠났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의 'Rain',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Merry cristmars Mr. Lawrence' 등의 음악으로 유명한 이 음악가는 이 작품에서 'solitude'(고독)라는 음악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연출은 역시 토니의 성장과 일상의 고독을 슬라이드를 통한 컷 전환으로 보여주어 마치 영화가 책장을 넘기듯 진행된다는 점이다. 또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들리는 배우들의 내래이션은 마치 e북의 TTS를 떠올리게끔 느껴지기도 했는데 가령 PTA감독의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소설 원작의 난해함과 몽롱함을 최대한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연출했다면 이 작품은 소설 원작을 읽을 때 느껴질 고독함과 고요함을 최대한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연출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작품 중간 중간 장면 속 인물들이 직접 내래이션을 이어 받아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소외효과 방식들은 고독한 독백이라기보단 인물들의 푸념, 감정 설득에 가까운 이질감을 조금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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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토니 타키타니 스틸 컷

 이 작품은 주인공 토니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아버지 아래에 자라 허무주의와 함께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세상살이 자체에 무감각증을 갖고 사는 인물로 등장한다. 인상 깊은 것은 주인공 토니와 그의 아버지 쇼자부로 역을 '이세이 오카타'란 배우가 동시에 겸하며 토니의 아내, 에이코이자 피고용인, 히사코의 역 또한 '미야자와 리에'란 배우가 동시에 겸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이 작품의 핵심 주제인 일상 속 고독과 행복의 무뎌짐의 감정이 만인에게 통용된다는 것을 짐작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의 핵심 미장센은 아내 에이코의 옷이다. 에이코는 옷이란 자기 안의 어떤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에이코에게만 옷이 그러한 역할을 할 뿐이지 모든 사람들은 항상 어떤 결핍을 채우거나 숨기기 위해 다양한 수집 행위들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귀고 사교 파티에 참석하고, 화분을 들이거나 애완동물을 키우고, 괜히 차를 바꾸고, 괜히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등 말이다. 그렇기에 과연 고독 그 자체를 영화 속 인물들, 혹은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특별한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공통된 특징,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토니와 쇼자부로, 에이코, 히사코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결핍은 어쩌면 고독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모호하다.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결핍은 행복에 대한 망각, 삶에 대한 무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는 '대념처경'(大念處經)이란 말이 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운 줄 알아야 하고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즐거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필자는 이것이 곧 행복에 대한 비결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불교는 순환에 대한 개념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념처경이 말하는 괴로운 것을 괴로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곧 고통의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니 괴로워하되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며 빨리 떨쳐내라는 말이 된다. 또한 즐거운 것을 즐거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즐거움의 순간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마음껏 만끽하고 이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해라는 말이 된다. 과연 이러한 대념처경의 진리를 <토니 타키타니>에서 실천한 인물이 있는가?한명씩 훑어보겠다.

 

토니 타키타니 스틸컷 (타키타니 쇼자부로)

 

1. 타키타니 쇼자부로 (토니의 아버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상실의 순간을 겪어서야 행복의 순간을 깨닫고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게 된다. 가장 먼저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품 후반에 사망한 토니의 아버지로 보여진다. 쇼자부로는 재즈 팀에서 관악기를 부는 연주자인데 영화 중반, 토니는 아버지에게 공연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그의 연주를 듣게 된다. 그러나 어쩐지 그 날 토니가 들었던 아버지의 연주 풍은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가 다른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토니는 그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지 못한다. 어쩌면 오랜만에 아들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공연 초청을 하는 등 챙기지 않던 아들을 챙기게 됐던 것도, 알게 모르게 연주 풍이 변한 것도, 모두 노쇠한 쇼자부로가 죽음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며 일상 속의 행복을 그제서야 자각, 만끽하려고 했던 발악의 자취들이었을 지 모른다.

 

2. 에이코 (토니의 아내)

 

 토니의 아내, 에이코의 옷은 에이코가 옷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고려해볼 때, 마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 속 이케아 가구들과 같이 일그러진 자본주의가 발현시킨 결핍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영화적 맥락을 고려해보자면 옷은 곧 무시되어 온 일상 속의 행복이며 악화되어 가는 쇼핑중독은 말하자면 행복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에이코가 처음부터 쇼핑 중독이 심했던 것은 아니다. 옷에 대한 집착은 프랑스 여행을 다녀온 후 악화되었는데 여행에 가져다 주는 행복도는 결코 일상 속에서 채워질 수 없는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경험이기에 아마 에이코는 일상 속에서 여행이 주었던 행복을 느끼길 지향하고 계속 쇼핑으로 그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하다.

 

 에이코는 결국 토니의 무게 실린 권언을 듣게 되고 쇼핑 중독을 절제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추구해 온 행복은 자신의 방식으론 일상 속에서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란 것을 자각, 환기해버린 것이다. 행복을 성취하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하는 에이코는 무기력해진다. 결국 에이코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는데, 참다 못한 에이코는 결국 자신이 가진 옷들의 일부를 조금씩 팔기 시작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에이코는 그제서야 자신이 추구해 온 행복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어왔지만 동시에 스스로 망각해 온 것임을 깨닫고 자신이 팔아버린 헌 옷들에게 미련이 남아 다시 중고샵으로 향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해버린다. 자신의 헌 옷에 대한 그 미련들은 어쩌면 에이코가 죽음을 마주하기 전, 삶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느낀 주마등형태의 일종이었을 지 모른다.

 

<토니 타키타니> 스틸 컷 (토니 타키타니)

3. 토니 타키타니

 

 타인이 에이코의 옷 컬렉션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병적 증세, 행복에 대한 무감각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에이코에게나 토니에게나 그녀의 옷 컬렉션이 상징하는 바는 그 둘만의 추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이코가 사망하고 아내에 대한 상실을 감내하기 힘들었던 토니는 그가 가진 일말의 소시오패스적인 면모 때문일까 에이코를 닮은 다른 여성을 직원으로 데려옴으로써 자리를 대체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모집 공고를 보고 토니를 만나러 온 새로운 여성, 히사코는 에이코의 유품을 입어 보게 되는데, 그녀는 에이코의 명품 옷들에 둘러싸이자 행복감에 눈물까지 흘리며 취업 조건 제안을 모두 수락하기로 한다. 하지만 토니는 히사코가 에이코의 자리를 대체하자마자 곧바로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애초에 새로운 여성으론 메꿀 수 없는 아내의 공석을 계속 메꾸고자 하는 행동은 마치 기존의 옷으로 행복감을 채울 수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옷을 계속 구매한 에이코의 행동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히사코가 집으로 돌아가고 토니는 에이코의 옷들을 바라보며 스멀 스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녀의 공석이 쉽게 대체되자 아내와의 추억들에 의미 자체를 둘 수 없게 된 것인데 그러자 결국 토니는 히사코의 취업 제안을 모두 거둔 후 그냥 아내의 공석을 유지하는 것에서 모자라 옷들을 죄다 갖다 버리게 된다. 그리고 토니는 깨닫는다. 자신이 아내와의 추억을 얼마나 하찮게 여긴 것인지, 히사코의 등장을 얼마나 당연 시 여긴 것인지 말이다. 이것은 히사코가 에이코의 옷들을 보며 보인 돌발성 행복에 대한 반응을 토니가 직접 목격하고 반성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상황에서 등장하는 영화 속 디졸브 장면과 토니, 쇼자부로의 부자 매치 컷은 우리의 삶이 고독과 상실, 망각의 연속, 그리고 반복임을 뼈저리게 시사하고 있다.

 

4. 히사코

 

 에이코의 명품 옷들을 보고 행복에 겨워 눈물과 함께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히사코는 토니가 공짜로 준 일주일 치의 명품 옷들에 익숙해져 타인이 호의로 건네는 장갑, 즉 가벼운 행복감에는 결코 반응하지 않는 적응력과 무감각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히사코의 이러한 모습은 에이코의 과거 모습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토니가 아버지, 쇼자부로의 삶을 비슷하게 추적한 것처럼 말이다.

 

  • 소감

 솔직히 말해 그다지 유명한 작품이 없는 이치가와 준 감독의 영화는 <토니 타키타니>가 처음이기도 하고 그냥 애초에 이 감독님의 이름 자체가 처음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가의 음악을 듣기 위해 찾은 작품이지만 원작 소설 자체가 좋은 건지 'Solitude' 음악이 이 작품과 너무 찰떡이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가 생각보다 꽤나 몰입되고 인상깊어서 한번 영화 감상 포스팅을 하고 싶었다. 개인적인 바람으론 <토니 타키타니>의 이러한 주제와 소재를 조금 더 탁월하게 연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척 많을 거 같아서 76분의 러닝타임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다만 영화를 다 보고도 마음 속에서 계속 느껴지는 무의식적인 고독의 진한 기분과 머릿 속에서 계속 맴도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잊혀지질 않아 나는 몹시 좋은 작품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별점 : ★★★★☆


 

주제 관련 추천 영화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명작, #익숙함에 대한) <데몰리션> - 장 마크 발레 (#상실에 대한, #대중적임), <고스트 스토리> - 데이빗 로워리(#심오함, #예술성이 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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