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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by 대담한도약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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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스토리(2017)- 데이빗 로워리


<그린 나이트>(2021)를 보고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작품이 궁금하여 새롭게 찾아본 작품이다. 고스트 스토리는 2017년 12월 28일에 개봉하였는데 개봉하고서도 대다수의 관객이 당시에 관람한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 극찬하였으니 그것은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표현방식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우에는 <그린 나이트> 관람 후 <고스트 스토리>를 보았는데 두 작품을 비교하여보니 감독이 선호하는 주제의 범주는 어떠하고, 또 자신있는 연출은 어떤 것인지 어느정도 파악이 되었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롱테이크나 음향을 잘 사용하는 감독이라고 느꼈는데, 롱테이크의 사용방식 같은 경우에는 호불호가 강할 수 있어 대중적이진 못하다고 느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고스트 스토리>이지만 이것은 귀신을 다루는 공포장르도 아닌데다 판타지 감성 로맨스라고 하지만 그런 로맨스같은 장르도 아니다. 굳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정확히는 애정하는 것에 미련을 남긴 자에 대한 비극이다. 포스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 생명체, 혹은 영혼이 하나의 명리를 터득해나가는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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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 음식을 먹는 롱테이크

<그린 나이트>와 <고스트 스토리>를 보면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롱테이크에서 가져오는 몰입감과 생생함을 정말 잘 이용한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가장 의아스러운 장면은 바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부엌 바닥에 털썩 앉아서 그릇에 있는 음식을 낙담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먹어대는 장면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장면전환없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롱테이크는 지루할 뿐이다. 관객이 그 장면에서, 영화라는 것을 보면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관찰 뿐이다. 영화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관객이 지루해 하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긴 이야기를 요약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데이빗 로워리가 의도해낸 가장 지루한 이 롱테이크는 오로지 고스트가 평생을 관찰해내며 겪어낼 지루함, 따분함을 포함한 망령의 삶을 관객에게 생생하게 체감시키기 위한 도전이었다. 비극적인 면은 당최 이 지루함을 감내해내지 않으면 결코 이 지루함을 깨달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 고스트의 욕구

영화는 이 롱테이크를 기점으로 이후 점차 빠르게 전개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아내는 집을 나가 사라지고, 새 가정이 이사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고스트는 의미없는 분노를 표출해내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그곳을 머무며 지박령이 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미련과 욕망을 마저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 부근의 고스트는 주인공만이 아니다. 창가 너머에는 또다른 고스트들이 보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근데 그게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시간의 또다른 이름은 망각이다. 그들은 망각을 겪는다. 대상이 누군지도 잊고서도 그것을 기다린다. 분홍색의 고스트는 주인공 고스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니예요 됐어요.' 사무치도록 깊은 미련들이 남아있는 듯한 이들의 대사와 행동에는 그들이 겪어온 망각과 미련, 허무함과 지루함, 답답함과 체념 그 모든 감정들이 생생하게 와닿는 듯하다. 하지만 저 먼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련과 욕망은 결코 관객과 주인공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부탁하고자 하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그들의 욕망과 미련은 순전히 그들의 것이며 그들이 해결해야할 문제로 영원히 남아있는다. 알다시피 망령은 결코 현생으로 돌아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들이 해야할 것은 털어버리는 것 뿐이다. 미련을 털어버리는 것, 포기하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짊어지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듯이 내려놓는 것 또한 그들의 선택인 것이다.

중장비가 집을 무너뜨리고 지박령들만 그 곳에 덩그러니 남는다. 분홍 고스트 또한 누군가를 기다린 모양이다. 그리고 말한다. '돌아오지 않으려나봐요.' 이내 천쪼가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영원할 줄 알았던 망령이란 존재와 미련은 동의어이다. 그 당시만해도 그들의 미련에 대한 집념은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미련들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들도 결심한다면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 인간이 남기는 작품과 미련들

홈파티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평범해보이는 한 중년층의 남성이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자신의 허무주의를 펼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여성들과 자잘한 수다를 떨다가 돈이라는 미시적인 단어 하나로 인간과 시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같은 예술을 언급하더니 이내 신을 꺼내든다. 방구석 소크라테스가 된 그의 논증은 우주와 광활한 미래의 영역으로 뻗쳐나가 인간이 자신을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욕구를 정확히 통찰해내 그것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 인간, 예술, 미련 그 모든 것들은 무한한 우주와 시간 아래에서 무기력하게 사라질 뿐이다. 그 자리있는 모든 이들이 흔해빠진 평범한 중년 남성의 논리를 타파해내지 못하고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 망각이자 미련과 동의어인 고스트가 그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의깊게 듣고 있었다. 자신의 최후를 들어버렸음에도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아내가 남기고 간 쪽지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 쪽지를 읽은 고스트 사라지다.

전개는 더욱 더 가속페달을 밟는다. 순식간에 대도시가 생겨 빌딩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중년남자의 말처럼 지구는 다시 수렵시대로 돌아가버린다. 전혀 다른 세대의 문명에서도 누군가는 쪽지를 쓰고 그 쪽지를 숨긴다. 굳이 왜 인간은 쪽지를 남기는가? 쪽지는 자신을 대변하는 도구이다. 내가 없는 곳에도 나를 남기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자신을 남기고 싶은 욕구는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 내면에 존재해왔다. 왜 아내는 쪽지를 남겼을까? 어떤 쪽지를 남겼을까? 라는 질문은 주인공 고스트의 영원한 숙제였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넘어 그는 자신의 과거와 동일한 상황을 관찰하는데까지 도달한다. 고스트는 결국 나무문틀 아래에 들어간 쪽지를 꺼내어 읽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는 왜 사라졌는가? 분홍 고스트의 경우 기다리는 이가 돌아올거라는 미련을 버리고 체념하여 사라졌다. 그렇다면 주인공 고스트도 체념하고 사라진 것으리라. 무엇에 체념하였는지는 상관없다. 굳이 열린 결말을 억지로 닫아보자면 그녀는 시덥지 않은 것을 썼을 것이다. 쪽지란 것은 자신이 없는 곳에 자신을 남기기 위해 쓴 것이다. 특정인을 위해서라면 분명 발견하기 좋은 곳에 두었으리라. 그들은 특정인이 아닌 베토벤과 같은 예술가들이 신을 위해서 곡을 쓰고 작품을 만들었듯이 전달의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주인공 고스트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다렸다. 왜? 베토벤에게는 자식과 부인은 없지만 조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쪽지, 교향곡이 신이 아닌 조카, 즉 자신에게 써진 것이라고 일말의 미련과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베토벤은 조카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는 시간이 지나 남편을 망각했을 것이다. 잊지 않았더라도 예전만치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것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박령과 달리 그녀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더욱 망각하기 쉬운 것이다. 새 남자를 만나고 이사를 가고 역시나 잘 살아갈 것이다. 적어도 영화 내에서 미련한건 고스트들 뿐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분홍색 고스트가 사라질 때 당황했을 것이다. 체념해버린 자의 소멸이 그토록 허무하고 단순할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흔히 아는 성불은 그렇지 않으니까. 주인공 고스트는 영겁의 시간을 쪽지 하나만을 보고 버텨왔다. 우리는 5분이 되는 롱테이크를 지겹게 버텨보았기에 비로소 주인공이 견딘 영겁의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미련이나 집념은 그다지 가질만한 것이 못된다. 괴롭고 허무하고 비참하다. 과연 그 쪽지가 고스트를 기리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한들 그것이 가치있는 기다림이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숭고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떠나는 이에게 그것은 무가치하다. 고스트는 머물러야 할 존재가 아닌 떠나야하는, 즉 잊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였기에 남아있는 것이 망령들이다. 그들의 욕망은 이별하지 않는 것일지 모르나 그들이 진짜 가져야할 목표는 이별하는 것이다. 이별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이다. 분홍색 고스트는 주인공보다 일찍이 과제를 달성한 것이다.


▶소감

필자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하는 이의 곁에 머무는 고스트의 숭고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그린 나이트>에서나 <고스트 스토리>에서나 언제나 영화의 참주제에 관한 실마리를 엑스트라나 조연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생성과 소멸, 만남과 이별에 관한 허무주의를 영화에 담아놓았다. 그가 숭고한 사랑을 지향했다면 그런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실마리를 단 하나라도 주었으리라. 영화는 필연적인 망각에 저항하여 고통받는 고스트를 앞세워 허무주의를 주장하고 입증하였다.

포스터는 당최 왜 이것을 로맨스라고 외치는가?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미련 뿐인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 사랑의 끝은 미련을 버린 것에서 완성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일 것이다. 고스트들은 미련해보였을지 몰라도 살아있는 이들보다 오랫동안 평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사랑했던 존재들이다. 감독은 사랑으로부터 상처받았던 것일까? 영화는 미련을 사랑이라고 외치고 미련을 가진 자를 괴롭히고는 끝내 그 미련을 영겁의 시간으로 굴복시켰다. 미련으로 사랑을 입증하는 인간은 결코 숭고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숭고한 사랑은 마치 없었다는 듯이 일말의 미련없이 잊어버리는 인간미없는 사랑이다. 고스트들은 그들이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지도, 심지어 어떤 이들은 어떤 것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지도 입증하지 못한다. 우리가 숭고하다고 착각하는 사랑의 실체는 우리가 관찰한 고스트들이다. 관객을 허무의 늪에 빠뜨리는 것이 감독의 목표였다면 완벽히 성공하였으리라.

목적없는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목적없는 미련에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고스트 스토리>는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을 저격하는 허무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한줄평



끝을 보고야 새로운 이름의 사랑을 하고, 끝을 만지고야 새 이름의 시작을 한다.(21/10/21)


미련도 사랑의 형태라면 데이빗 로워리는 그 사랑을 굴복시킬 자신이 있다.

▶별점 :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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