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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뜨>- 레오 카락스

by 대담한도약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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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뜨(2021)

노래나 뮤지컬 장르의 영화는 많고 많지만 이렇게 그 색채가 선명한 영화는 드물다. 다른 영화의 경우엔 관객을 주인공이 거니는 장소로 소환시키려는 경우라면 이 영화는 오직 관객을 극장에서 뮤지컬 공연장으로 소환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 속 인물들 또한 영화 바깥에 있다가 영화 안으로 참여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자말자 다시 영화 바깥으로 나와 무대인사를 건넨다.

이 작품은 비록 작품을 카메라에 담고 있지만 만드려고 하는 결과물이 뮤지컬이란 것을 고집하기에 독특한 연출과 소품, 미술들이 돋보였다. 연출의 경우 필자가 본 영화 중 <씬시티>(2005) 같은 B급 연출들이 고의로 씌인 듯하였다. 가령 특정 사물 또는 인물이 가위로 오린 듯 튀어나와 반투명상태로 관객 앞으로 줌인되는 것들이 특히 그랬다. 그리고 아네뜨 가족이 요트 여행에서 기상악재를 맞닥뜨렸을 때 현장의 생생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무대장치들을 이용하여 물보라와 바람을 연출한 것을 일부러 눈치채게 만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관객이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지양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무대를 무대로써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아네뜨의 아버지 헨리 멕헨리(아담 드라이버)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분신이 아닐까? 유명 개그맨 헨리는 자신의 쇼에서 발언되는 모든 이야기를 관객들이 단지 개그로써만 받아들이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개그맨이 된 이유를 묻자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그야말로 자신이 죽지 않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렇기에 레오 카락스가 이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지 않아 생동감을 죽인 것은, 관객이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통제한 것은 자신의 고해가 담긴 이 이야기를 단지 이야기로만 지켜보라고 당부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자전적인 경향이 물씬해서 물론 전방위적으로 우수한 작품이나 관객을 눈치보지 않고 튀어나오는 메타포들이 많았다. 가령 아네뜨의 어머니 '안'의 사과가 그러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네뜨가 목각인형으로 등장한다는 대목일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목각인형이었던 아네뜨는 분명 감정표현을 가진 인간임에는 틀림없지만 인물을 표현하기를 어째선지 배역을 쓰지않고 마리오네트를 쓴다. 인형이 움직임을 잃는 것은 작품의 최후에 인간 아네뜨가 등장할 때부터이니 관객은 이 인형으로부터 불쾌한 골짜기를 가진다. 하지만 인형은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말을 하며, 배우들은 그를 진짜 아이처럼 다루니 그들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는 분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과연 멕헨리는 딸 아네뜨를 사랑하였는가 일 것이다. 작가론적 관점에서는 물론 그는 딸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고해할만큼 진심을 담아 사랑하고 아낀다. 허나 작품 속에서는 어떠한가? 멕헨리는 자신의 명성과 인지도를 되찾기 위해 딸을 사랑한다. 멕헨리가 사랑한 딸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목각인형인 딸이다. 작품이 결말에 다달아 멕헨리는 면회을 온 아네뜨에게 ' 내가 너를 사랑하면 안되겠니?'라고 묻자 아네뜨는 멕헨리에게 아빠는 그 누구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멕헨리는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의 유인원'으로 명성을 떨치던 과거에 얽매여 산다. 그 결과 자신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멕헨리가 자신을 바로 잡고 주변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자신을 사랑했어야 했던 것이다.

작 중 아네뜨는 참으로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 누구도 아네뜨를 인간으로 바라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안'은 아네뜨를 복수를 위한 도구로 보았고 아버지 '멕헨리'는 돈과 명성을 위한 도구로 보았다. 심지어 안의 동료이자 전 애인이였던 지휘자마저 아네뜨를 과거 '안'과의 유대를 확인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도구로 대하였다. 다만 이 셋이 아네뜨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이분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뒤언저리가 되어버리고 개인의 욕망이 더 발현된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아네뜨에게는 언제나 원숭이 인형이 함께하였다. 신의 유인원이었던 아버지를 떠올리기 위해서였을까. 그녀의 손엔 원숭이 인형이 항상 있었다. 어른들이 아네뜨를 사랑하면서도 올바르게 취급하지 않았듯이 아네뜨의 미움 또한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른들을 증오했으나 무의식적으론 부모의 존재가 그리웠으리라. 보고 싶기에 면회를 갔던 것이다. 아네뜨가 단순히 인형 또는 사람, 그렇게가 아니라 인형도 존재하고 사람인 아네뜨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존재 모두 아네뜨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는 애정과 증오에 대해서 감정이란 것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인형은 과거이다. 앞으로 면회장을 나와 한 명의 독립된 사람으로서 살아갈 아네뜨는 인형에서 벗어났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현재과 미래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것은 멕헨리에게도 동일하다. 아네뜨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날아갔어야 했을 나비였다. 멕헨리에게는 그 아네뜨의 고치같은 인형을 통해 자신의 과거 행실을 직시했으리라. 인형 속에 존재했던 사람 아네뜨를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과거를 살아갈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야한다고 말이다. 목각인형 아네뜨는 신에게, 광대극에 예속된 자신의 과거 유인원 시절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아네뜨에게 필요했던 것이 뛰어난 가창력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살아갈 자립심이었듯이 멕헨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했다. 작 중에서 멕헨리가 목각인형으로 표현된 적은 없지만 그의 삶은 목각인형에 가까웠다. 주위의 평판에 흔들리고 과거에 집착한 인형말이다.

이 영화는 멕헨리, 혹은 감독의 고해이다. 과거에서, 대중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혹된 채로 인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 자신의 고해말이다. 그것을 자식인 아네뜨에게 그대로 투영시켰기에 얼마나 쪽팔렸겠는가. 아담 드라이브의 연기는 그것을 표현해내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것에 집착하는 삶은 이 영화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 고해를 통해 누군가가 자신처럼 되지 않았음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성찰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뉘우침의 표상으로 보여진다면 분명 감독은 만족하리라. 필자는 그렇게 보였다. 아마 현실의 아네뜨에게는 자신의 고해와 진심어린 사과가 통하였지 않았을까 싶다.




▶한줄평

극이 되는 순간 모든 고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마법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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