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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루카>-엔리코 카사로사

by 대담한도약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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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루카(2021)&amp;amp;amp;amp;amp;amp;amp;amp;nbsp;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루카>는 디즈니 픽사의 <소울>을 잇는 시원한 이탈리아 바닷가 마을을 연상시키는 여름 영화이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그의 단편 영화 <라 루나>도 볼만하니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시청해봐도 괜찮을거 같다.

<루카>는 디즈니 픽사의 영화이긴 하지만 지브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지브리의 작품들을 보면 대개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아래 영상을 본다면 <루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튜브 채널 영화잡학사전

위의 유튜브를 보면 작 중 루카의 둘도 없는 친구인 '알베르토'는 실제로 엔리코 카사로사의 친구 이름이라고 하는데, 감독은 <루카>를 통해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친구의 존재와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보면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져 올라온다.

우리를 물 속의 세계로부터 끌어올려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카사로사 감독에게 친구란 물 속에 갇혀있는 '나'라는 존재를 물 밖이라는 낯설고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주는 소중한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가족 또한 그러한 존재해 포함시킬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사실 저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라도 영화가 청량하고 명료하여서 너무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한줄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앞바퀴, 뒤바퀴가 모두 존재할 때 비로소 대지를 누빌 수 있다.





(스포주의)



이 영화의 관람포인트는 세가지이다.

  1. 시원하고 청량한 이탈리아 해안마을 풍경
  2.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의 우정과 성장
  3. 바다괴물을 배척하는 육지괴물

 

이 중에서도 우정과 배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넓고 커다란 주제는 루카와 알베르토의 우정이 바탕이 되었으며 깊고 은연하게는 지상인과 어인들 사이의 '배척'이란 주제 또한 존재한다. 두번째 주제같은 경우에는 루카와 알베르토가 끈끈한 우정을 통해 함께 넘어서야할 장애물이 되었다. 그들은 베스파를 타고 자유롭게 누빌 것을 꿈꾸었는데 이것은 결국 그들이 물 속이란, 외딴 섬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에는 지상인을 마주하고 극복해야한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우선 바다괴물 vs 육지괴물이라는 내용, 그리고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 이 세 아이들의 우정과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 바다괴물 vs 육지괴물

 


육지 괴물이야! 어서 돌 밑에 숨어!



가족들과 함께 물고기 농장을 운영하는 꼬마 바다괴물 '루카'는 수면 위를 떠다니는 배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부모님은 루카의 호기심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에게 조심할 것은 당부한다. 루카는 물고기 떼를 끌고 다니며 해초를 먹이는 것이 일상인데 해초를 먹이는 와중 수면 위에서 배가 돌아다니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물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루카네 종족을 '바다 괴물'이라고 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카네 종족은 지상의 사람들을 '육지 괴물'로 칭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괴물로 불리울 뿐, 서로 그들이 정확히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함과 경계심은 괴물이 아닌 그들이 서로를 괴물로 호칭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루카와 같은 어린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각인된 물 바깥 세상을 그저 아이들에게 주입시켰을 뿐이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주입받은 이미지로 '육지 괴물'들을 판단한다. 이것은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수없이 많은 세대들을 걸쳐 서로를 차단하는 벽을 만들었다. 사실은 루카네도 괴물이 아니며, 배를 타고 다니는 지상인들 또한 괴물이 아니다. 단지 각인된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지상인들의 경우 단 하나가 다르다. 그들은 가해자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루카네 종족을 혐오하고 박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포르토로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마주할 때 이렇게 평가했다.

  생선비린내가 나, 징그러워, 무서워  


루카네가 그들을 위협했기 때문에 박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편협하고 지상인본위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판단하여 죽이려던 것이다. 박해에는 어쩌면 그다지 큰 사연이나 이유가 필요없을지 모른다. 하고자하면 이유 따위는 아무렇게나 붙여지는 것이다. 반대로 루카네가 지상인들을 혐오스럽게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은 각인된 이미지로 서로를 혐오한 채로 마주한다. 지상인은 바다괴물을 위험한 생물로 여기어 잡아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작 중에서 루카네 종족이 인간을 다치게 하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몰래 변장하여 그들 속에 어울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카드게임을 즐기는 친화적인 종족이었다. 루카네 종족은 자신을 위협하는 지상인을 피해 숨고 도망칠 뿐이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심해까지 숨어들어가 살아간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물 밖으로 나온 부류는 세 부류이다.

  1. 진실을 알고 그들과 어울려 살아온 장년층
  2. 루카를 구하러 모성애를 품고 위기를 무릅쓴 부모님
  3. 호기심을 품고 넓은 세상에 도전하는 아이들


장년층은 진실을 볼 줄 아는 지혜를, 부모세대는 사랑과 관심, 보호를 내재하였을 때 비로소 루카와 같은 아이들은 그들의 희망과 가능성이 되어 세상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부모의 세대는 필요하다면 아이를 어쩌면 제네바의 학교와 같은 미지의 세계로 보내줄 수도 있어야한다. 그것은 아이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부모세대는 아이를 심해 깊숙히 가두어 눈이 멀고, 색이 희미한 인간으로 퇴화되도록 두지 않을 수 있다. 루카네 종족은 작 중 아이를 넓은 세계로 인도하고, 보다 성숙하게 길러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다 괴물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였던 존재는 누구었는가?

  1. 똑같은 언더독(아웃사이더)이라며 그들을 포용하였던 줄리아
  2. 우연히 찾아온 그들을 아버지같은 온정으로 품어준 줄리아의 아버지


누군가가 생선비린내가 나고, 시체에서 옷을 뺏아입은거 같다고 하였을 때, 줄리아는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주었다. 그것은 동질감이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언더독으로서의 동질감이 아닌 인류애적인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줄리아의 아버지같은 경우 처음엔 줄리아의 친구라는 이유로 알베르토와 루카를 받아들였지만 후에 정이 들었을 땐 그들이 지상인이던간 바다 괴물이던간 상관없었다. 그들은 그저 '가족'이라는 단어로 뭉쳐졌다. 필자는 바다 괴물을 소수자라고 표현하지 않겠다. 배척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합할 수 있는 것에는 인류애적인, 가족같은 사랑이 필연적이다. 반대로 같은 지상인들끼리 서열을 매기고 힘겨루기를 하였던 인물은 작 중 유일한 악당으로 등장하였다. 지상인은 우리 인간이 모두가 편견없이 화합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선 무엇을 내재시키고 무엇을 멀리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줄리아네 아버지는 한팔이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이다. 이러한 인물이 바다 괴물을 포용하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억압하려고 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캐릭터를 장애인으로 만든 것에는 줄리아와 아버지를 묶어 그 가족이 언더독에 속하였다는 것을 설정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를 루카와 알베르토의 여정을 긴장감있게 조으기 위함을 넘어, 억압을 잠재우는데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자칫 무력에 대한 오해가 생길만한 여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마을 사람들이 눈치를 주는 편으로 남은 소수를 잠재우는 것이 더욱 교훈적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루카를 여전히 억압하려했던 장면에선 현실적인 씁쓸함을 남겨준다.

(+물 밖에선 지상인처럼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흥미로운 소재로부터 시작하였겠지만 이것은 결국 바다 괴물 또한 지상인들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바다 괴물인 채로 화합시키는 방법을 모색했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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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의 우정과 성장


루카의 친구 '알베르토'는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실제 친구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은 장난꾸러기 알베르토가 소심하고 조용했던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즉 '루카'는 어쩌면 유년시절 카사로사 감독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친구가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몹시도 어필하고 있다.

그렇다면 루카는 어떤 친구를 사귀었을까? 알베르토, 그리고 줄리아이다. 그 중에서도 물 바깥 세상으로 그를 인도해준 알베르토가 루카의 인생에 가장 큰 파급력을 끼친 것은 이미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을 잘 알 것이다. 그는 루카 내면의 '브르노'를 닥치게 해준 장본인이다. '브루노'는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겁쟁이를 의미하는데, 어쩌면 그런 조심스러움으로 인해 심해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알베르토와 루카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해준건 순발력있는 루카의 브루노였다. 가령 직접 만든 베스파를 타고 공중에 날아오른 뒤 암초 위로 떨어질려고 할 때 루카가 알베르토를 차서 암초를 피한 것처럼 말이다. 브루노는 선하다 악하다를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셀렌치오 브루노'를 남용하다간 정말 큰 위험을 인지못할 수도 있다. 아이들의 영화에서 '셀렌치오 브루노'를 너무 세뇌시킨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고 오해하지말자. 브루노는 진심으로 가장 우리를 아끼는 우리 편이다. 아래 사진을 보라. 정말 예뻐보이는 소년들의 모습이지만 저 장면이 정말 예쁘기만 한가? 위험해보이진 않는가? 동화적인 연출에 현혹되지 말자. 브루노를 무시했다간 자칫하면 베스파가 아니라 구급차를 타야할지 모른다. 어쩌면 리무진까지일지도.

(+ 알베르토의 '셀렌치오 브루노'와 루카의 '셀렌치오 브루노'는 작품의 끝에 가서 곱씹어본다면 그 뜻이 다르다. 뒤에서 설명하겠다.)

이동진 평론가님은 작 중 '베스파'라는 스쿠터를 작품의 맥거핀같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나는 '셀렌치오 브루노(입 닥쳐 브루노)'라는 메세지와, 우정에 관한 메세지를 모두 다 묶어서 맥거핀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세지를 접하기 전에 만나는 일종의 에피타이저이다. 루카가 성장한 발단은 분명 알베르토이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제 3자가 한 사람의 성장을 이끌어내는데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루카를 성장시킨 것은 다른 요소에 있다.

 

2-1 루카는 어디로 가는가?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루카는 어디로 가는가??

물 속 -> 외딴 섬 -> 포르토로소 마을 -> 제네바의 학교-> ???



루카의 세계는 점 점 확장한다. 더 넓고, 더 넓고, 더욱 광활한 곳으로 간다. 물이 만들어낸 어떠한 경계, 결계를 깨부수어준 것은 분명 알베르토이다. 하지만 그 후에 스스로를 나아가게 만든 것은 루카 본인이다. 마을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루카이고, 제네바 학교를 가고 싶어한 것도 루카이다. 동화라는 필터를 찢어버리고 까칠한 시선으로 보겠다. 루카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는 동안 알베르토는 무얼 하였는가? 만일 루카가 제네바를 가고 시간이 지나 그 너머를 갈 때, 알베르토가 포르토로소에 머물러 있는다면 그들의 격차는 얼마나 더 벌어질 것인가? 잔인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을 우리가 선택해야하는지 말이다. '셀렌치오 브루노'를 알려준 것은 알베르토이지만 '셀렌치오 브루노'를 깔끔하게 정제시키고 진정으로 참 뜻을 깨우친 것은 루카이다.


2-2 두 소년의 '셀렌치오 브루노'

루카는 줄리아에게 책과 망원경을 통해 천문학을 배웠다. 루카는 항상 그 다음을 궁금해하는 아이이다. 호기심이 많은 루카는 언제나 물어본다. 부모님에게, 알베르토에게, 줄리아에게 그는 항상 질문을 하며 세상을 배울 준비가 되어있다.

'배는 어디서 오는거예요?'
'베스파 마을에 가면 어떨까?'
'학교는 어떤 곳이야?'
'우주의 너머에는 뭐가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는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탐험가이다.


알베르토는 물 바깥 세계, 즉 지상인들의 세계를 루카보다 빨리 터득한 아이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러한 부모의 품에서 자라난 덕분이다. 더 많이 알고 있음에도 알베르토는 어쩌면 루카보다 더 순수하다. 루카가 베스파에 망원경을 달자고 제안하였을 때 알베르토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좋아! 앞에서 번개를 뿜어내는 그런 망원경 말이야!'



루카는 망원경은 번개를 내뿜는게 아니라 우주에 별을 보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자 알베르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그리고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을 보이며 루카에게 호응해준다. 그는 루카보다 아는 것이 많지만 루카가 보유한 '호기심'이라는 탐험가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알베르토는 제네바에 떠나지 않는다. 루카는 제네바로, 알베르토는 포르토로소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인물의 설정 상 당연한 결과이다. 루카는 알베르토에게 배운 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정제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가령 '셀렌치오 브루노' 말이다.

루카의 '셀렌치오 브루노'는 새로운 것을 탐험하고자하는 호기심에 대한 도전이다.
알베르토의 '셀렌치오 브루노'는 과감한 도전을 할 때 자기 암시를 거는 주문이다.



'셀렌치오 브루노'가 처음 등장한 것은 막무가내로 만들어낸 그들만의 베스파를 타고 절벽에 뛰어들 때이다. 동화답게 미화되었지만 여기서의 '셀렌치오 브루노'는 분명히 무모함을 뜻한다. 이것은 '자신만은 부정적인 결과를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자기 암시에 불과하다. 어린 아이가 품을 수 있는 순수하고 무모한 주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이러한 감정적인 판단을 배제하는 법을 배운다.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보다 최대한 계획하고 짜임새있게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을 선호하고 또 그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알베르토의 '셀렌치오 브루노'는 오래 가져갈 것이 못된다. 이 주문은 유년기에서 탈피하면서 꼭 버려두고 나와야하는 주문이다.

반대로 루카가 보여주었던 '셀렌치오 브루노'는 조금 다른 것이다. 알베르토의 주문은 자기 암시를 위한 것이라면, 루카의 주문은 모험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더 넓은 공간에 간다고 주문을 외우진 않는다. 굳이 달달 외면서 자기 암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험은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셀렌치오 브루노'에 관련하여서는 이쯤하도록하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루카는 알베르토에게 배운 것을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간다. 나는 이것을 연결이라고 하겠다. 이 때 항상 수반되는 것은 새로운 만남이다. 새로운 공간엔 언제나 새로운 만남이 있다. 이것은 긍정적인 연결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연결에서도 동일하다. 심해라는 공간으로 갈 때는 징그럽고 무의지한 심해어 '우고'가 있다. 모든 연결에는 만남이 수반된다. 물 밖으로 나갈 땐 알베르토라는 인연이 생겼다. 그리고 포르토로소에 도착하자 줄리아라는 인연이 생겼다. 엔딩크레딧를 보면 루카는 제네바에서 또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그들은 모두 루카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루카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정제시킨다.

 

외딴 섬의 알베르토에게 걷는 법을 배웠고 인간세계를 배웠다.
포르토로소 마을의 줄리아에게 자전거타는 법을 배웠고 천문학을 배웠다.
˙˙˙
제네바 학교의 인연에게는 과연 어떤 것을 배울까?

루카는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록 더욱 심화적인 것을 학습하였다. 물 속에 머물렀다면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큰아빠 우고와 심해로 갔다면 누워서 고래 시체나 먹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연결은 결국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이다. 필자는 우정도 우정이지만 더욱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연결'이라는 더 중요한 메세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정'이 아이들을 위한 메세지라면 '연결'은 어른들을 위한 심화적인 메세지이다.



나 자신을 어떠한 공간으로 이끌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그곳에 도달한 모든 인연이 좋은 것은 아니다. 공간의 성질과 인연의 성질은 일치하지 않다. 그것은 포르토로소 마을에 '줄리아'같은 선하고 포용적인 인물과 대립하는 유일한 악역인 '에르콜'같은 권위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어리석은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러한 '연결'과 '인연'의 성질이 이해되었다면 심해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고 유추하는게 가능할 것이다.
부모님이 방학을 맞이해 루카를 심해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나쁜 결정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루카의 동반자를 '우고'라는 인물로 선택한 것이 정말로 나쁜 결정일 것이다. 그는 제 앞도 볼 수 없는 장님과 같은 인물이다. '눈'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우고는 욕망도 욕심도 바램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허망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루카와 같은 어린 아이가 이런 어른과 함께 자라는 것은 식물에게 맑은 물 대신 독극물을 부어주는 것과 같다. 즉각적으로 식물의 시각적 반응을 나타내진 않지만 얼마 안가 식물은 죽어버릴 것이다. 루카는 진작에 안 것이다. 우고와 함께 간다는 것은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만일 알베르토가 아닌 우고와 물 바깥 세상을 함께 나갔다면 어땠을까? 그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거란게 안봐도 뻔하다. 연결도 중요하지만 그 연결을 누구와 함께하는가도 대등하게 중요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른 평론가들은 아마 이 작품에 이런 까칠하고 비판적인 평론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동화는 동화고 삶에 적용하고 배우기 위해선 필터를 벗겨놓고 바라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서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자. 카사로사 감독은 친구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알베르토와 같은 친구의 소중함을 어필한 것일 수 있겠으나, 뿐만 아니라 '에르콜'이라던가 '우고'와 같은 친구를 배제하여야 하지 않을까? 비단 친구뿐만이 아니다. 모든 인연에 있어 그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 개인적으로 '우고'와 같은 인물을 큰아빠라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프레임을 확실하게 씌우지 않은 것은 디즈니의 잘못된 욕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냉철하고도 새로운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루카네 가족들은 암묵적으로 하고 '우고'를 비판하지 않지만, 쿠키영상을 보면 관객이 우고같은 삶을 선망하지 못하도록 연출해놓았기 때문이다.


▶소감

얘기할거리가 많아 곱씹을 맛이 있었던 영화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책 중에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라는 제목인 것이 있다. 평론집인데, 이러한 제목은 루카같은 작품에 있어서 참으로 탁월한 센스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연결'에 대한 내용을 서술해놓아서 추천할 책이 있는데, 여유가 있다면 한번 찾아 읽는 것을 권장한다. 비판할 것이 많은 책이지만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우리에게 정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2021.06.27 - [B-ook] - 「약한 연결」-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아즈마 히로키

 비판할 것이 많은 책이다. 가령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을 언급할 때 그러하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습득한 자와 아닌 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인간이 낯선 것, 새로운 것과 새로운

hellobrofriend.tistory.com



별점 : ★★★★☆


(+ 엔리코 카사로사감독의 단편영화 <라 루나>도 충분히 볼만하니 여유가 있다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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