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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이준익

by 대담한도약 2021.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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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왕의 남자&gt;(2005)



천만영화가 무엇인지 보여준 영화, 자타공인 이준익 감독 최고의 작품.
마음껏 누구의 눈치보지 않고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내 블로그 개설의 목표였다. 잘쓰든 못쓰든 나의 발전을 보는 것 또한 내가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나니 그 생각이 흔들렸다. 정말 잘 쓰고 싶다. 내가 흐트림없이 <왕의 남자>의 모든 것을 들이마셨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모자란 실력이지만 감히 써보려고 한다. 이 영화를 한 줄로 표현한다면 이렇게하고 싶다.

하늘과 땅이 만난 반허공에서 사람과 탈이 있었다.



이 영화는 원작 연극 <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역사적 시기는 조선시대 연산군 때인데, 한국사와 원작 연극에 대한 빠삭한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정말 화려하고 선명한 작품이니 혹시 보지 않았다면 꼭 보셨으면 좋겠다.
+간략한 줄거리를 서술하고 시작해보겠다.



(스포 주의)






작품에 나오는 광대 장생과 공길은 변두리의 동네에서 극단에 소속되어 하루 먹고사는 것을 근근히 하는 인물들이다.
공길같은 경우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고운 자태와 외모로 인해 놀이판에서 주로 각시탈을 쓰고 여성의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유별난 취향을 가진 양반들이 그를 탐하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장생은 그런 공길을 구해주고 한양으로 달아나게 된다.

광대 공길(이준기)


장생과 공길은 한양의 판에 가서 육갑, 칠득, 팔복을 만나게 되는데, 셋이 벌이는 판에 난입하여 실력을 선보이고 그들을 압도해낸다. 그렇게 이 셋은 그들에게 영입제안을 하게 되고 장생은 육갑에게 이렇게 묻는다.

한양에서 제일 큰 판이 벌어지는 곳이 어디오?



그러자 육갑은 한양의 도성은 연산군이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몰아냈고, 그로 인해 이젠 그러한 판이 사라진지 오래라고 답한다. 대신 도박판으로 향한 그들은 우연히 연산군의 여자 '녹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 '녹수'라는 인물은 연산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아래 영상을 보면 작품에서 '장녹수'라는 궁녀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을 떨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를 즐기는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

https://youtu.be/Ya-eUyEZic0


왕을 어린아이처럼 갖고 놀았던 여자 '장녹수'. 실은 그런 궁녀가 기생출신이며 왕을 치맛폭에 싸고앉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장생은 왕을 풍자하는 판을 벌인다면 큰 돈을 벌여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순서대로 팔복(이승훈),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그렇게 왕을 풍자하자 떼돈을 벌게 되는데, 이를 계속하자 왕을 희롱한 죄로 의금부로 끌려가게 된다. 장생은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라며 왕을 웃겨보겠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왕 앞에서 광대놀음을 하게 된 이들. 하지만 한양 패거리 삼형제는 긴장이 바짝들여 대사는 물론 동작과 순서까지 까먹게 되고 연회장에는 살벌한 정적이 흐르게 된다. 장생과 공길은 정적을 깨고 대담하고 즉석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기지를 발휘하고 왕을 웃기게 된다.

공길 : 자, 윗 입 대령이오~!

 

연산군이 자신을 풍자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희락원에 들어오게 된 패거리. 광대들이 희락원에 자리하여 왕에게 풍자극을 보인 것은 모두 '처선'이라는 신하의 큰 그림이었다. 왕과 신하들을 풍자하는 광대극을 이용하여 연산군이 간악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올바른 정치의 길로 가도록 유인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광대들이 풍자극을 할 때마다 연회장에선 연산군의 피의 형벌이 일어나고 만다. 또한 처선의 예상과는 반대로 연산군은 공길이란 광대에게 빠져 나라를 살피지 않고 매일 연회를 열어 광대극을 보았으며, 밤에는 공길이를 불러내어 인형극을 하곤 하였다. 이제부터 <왕의 남자>는 진정한 놀이판을 시작한다.



<왕의 남자>에서 놀이판은 왕이 직접 나서면서부터 급격한 엑셀을 밟는다. 감독의 연출은 연산군이라는 왕을 한껏 익살스러우며 감정에 있어 한없이 격없고 절제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폭군으로 묘사되는 연산군의 성격 중에서 이러한 흥많고 아이스럽지만 불안정한 모습을 부각시켜 표현한 것은 마치 연산군이 광대극의 캐릭터로서 보이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실제로 광대극 속에서는 참여한 인물들은 신분이 왕이건 천민이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한다는 원론적인 대등에 놓인다. 이것은 연산군에게 비춰지는 불안정한 불균질로 관객에게 긴장감과 불안함을 조성시키는데, 비유하기를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광대들의 밧줄타기를 보는 것과 같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은 장생과 공길과도 같은 광대인 것이다.

광대극에 직접 참여하는 연산군의 돌발적인 행동


하지만 연산군이 만들어낸 우리의 위태로움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지는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데, 그 다음으로 보이는 연산군의 행동은 관객에게 그의 내면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인식시킨다. 양손으로 팔자를 그리며 요런 것을 달라는 장생, 도자기를 가져오자 답답해한다. 그제서야 연산군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녹수를 데려와 장생에게 바친다. 제아무리 극이라곤 하나 지극히 사랑하는 녹수를 서슴없이 곧장 장생에게 바치는 연산군. 그는 놀이극에서만큼은 다른 인격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인다. 살벌한 긴장감 다음으로 오는 혼란 속에 갈피를 못잡는 관객들은 새롭게 들이닥치는 파격적인 연산군의 이미지에 그대로 환승하여 작품의 고조 속으로 넘어간다.

좌 공길/ 우 연산


연산은 공길을 매일 자신의 거처로 불러 놀이를 즐겼다. 위 장면에서 연산은 인형을 뺏어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데, 공길은 자연스럽게 여성을 상징하는 각시탈을, 그리고 연산은 남성을 상징하는 탈을 들고 있다. 공길과 연산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인데, 연산이 공길을 단순 광대로서의 흥미가 아닌 성애(姓愛)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때부터 보여준다.

연산은 공길과의 인형극 이 후 녹수에게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못한다. 그의 머릿 속엔 온통 공길과 광대극 뿐이다. 공길의 만남이 그를 광대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산군이 왜 장생에게 녹두를 바쳤는지를 알 수 있다. 연산군이 광대가 된 이후로 장생과 연산군은 경쟁의 관계가 되었다. 그가 녹수를 대령한 것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것은 단지 그냥 의미없는 우스꽝과 어리석음을 표현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녹수를 대가로 공길을 가져가겠다라는 거래를 광대극 속에서 행한 것이다. 이 작품의 화려함과 선명함은 오히려 이러한 절제있는 묘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장생은 또다시 심란함에 빠진다. 처음 그가 심란함에 빠졌던 것은 작 중 초반에 공길이 양반에게 팔려갈 때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공길이 왕에게 팔려갈 때 심란함에 빠졌다. 그는 양반이 감자를 주던지, 연산이 녹수를 주던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공길과 함께 먹고 살았으면 했는데, 항상 자신의 신분보다 높은 자가 공길을 빼앗아 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연산군을 단순한 도구로서 두지 않았다. 공길과의 인형극은 연산군의 외면적 욕구를 보여주었고, 연산이 혼자 만들어낸 인형극은 내면적 욕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는 왕이기에 이러한 부끄러운 욕구들을 내보일 수 없었다.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것. 그리고 실은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왕으로서 받는 압박감들, 고립감. 그는 이런 솔직한 감정은 광대가 되어 공길과 함께할 때에만 표현할 수 있었다. 공길은 연산에게 그런 존재였다.

( 필자는 <미 비포 유>에서 인물들이 감독의 도구가 되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비판하였었다.)
2021.06.08 - [M-ovie] - <미 비포 유>-테아 샤록

 

<미 비포 유>-테아 샤록

 전신 마비로 휠체어를 탄 불행한 주인공을 구원해주는 뜻밖의 인연을 소재로 하는 명작을 기억하는가? <언터쳐블: 1%의 우정>(2012)는 돈많은 재벌 백인과 가난하지만 유쾌한 흑인이 우정을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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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 니가 그러고도 성군이 될 수 있겠느냐!"

공길은 양반에게 팔려갈 때와 달리 진심으로 연산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절제미가 정말 돋보이는 것은 장생이 공길에게 어떠한 마음을 갖는지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생에게는 항상 무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길만한 명분이 있었다. 양반에게서 공길을 구할 때에는 존엄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왕에게서 공길을 되찾아오려고 할 때에는 신하 '처선'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공길에 대한 마음을 숨겼다. 장생이 공길에게 품은 마음은 어떨까?

이것 또한 그들의 놀이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장생은 언제나 공길과 함께 판을 꾸몄는데, 공길은 여성이, 장생은 남성이 되었었다. 비록 풍자극이긴 하였지만 항상 그들은 극 중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겉으론 표출할 수 없는 부끄러운 욕구, 그렇지만 천한 광대라면 가능했다. 연산, 공길, 장생 삼각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산군의 표현은 자기중심적이었다. 극에선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였다. 자기중심적인 연애는 상대방을 지치게 만든다. 연산군에게 호감을 보였던 공길은 지쳐갔다. 그토록 화려해보였던 궐 내의 생활은 공길에게는 언제부턴가 벗어날 수 없는 감옥같은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폭정으로 종묘와 사직을 능멸한 네 놈의 죄를..."

언제나 그랬듯 자신들을 위협시키던 존재들을 풍자하였던 공길. 왕이 자신들의 벌이를 방해하여 풍자하고, 양반이 자신들을 내쫒으려하여 풍자했다. 그리고 또다시 왕이 나라를 위협하여 풍자하였다. 화살을 쏜 대목부터 필자는 연산과 공길의 연애 중 다툼으로 보았다.

장생의 풍자 대상에 대한 견해도 있다. 그들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장생은 항상 공길을 위협하는 대상들을 풍자했다. 공길을 빼앗아가는 양반들을 풍자하고, 왕을 풍자했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사실 필자와는 조금 다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선 너무 끼워맞추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장생은 단지 벌이를 위한 것이였는데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지 연출상 그러한 것을 필자는 보지 못했고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가져왔는가도 잘 모르겠다.

녹수의 계략으로 연산군은 능멸죄로 공길을 죽이려고 한다. 필자는 이게 이별을 선포한거와 똑같이 보았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연산은 녹수처럼 자신의 기분과 비위를 맞춰줄 수 있는 그런 상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공길은 아니었고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장생은 왕을 능멸한 것은 자신이라며 공길을 구해준다. 삼각관계에서 연산은 빠지고 또 다시 공길과 장생은 이 대목에서 결합하였다. 하지만 왕은 공길과 이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장생은 처선이 공길을 잊고 도망쳐라고 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온다. 왕에게 붙잡혀있는 공길을 구하러 온 것이다. 왕의 노여움을 산 장생은 자신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눈을 빼앗기고 만다.

예술작품에서 눈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오랜 과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때부터 그러하였듯 눈은 욕망의 상징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자기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었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는데, 이것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후회하며 그것을 다신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을 의미했었다.
2021.06.11 - [B-ook] -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의 그림은 바로 오이디푸스와 그의 딸 안티고네의 모습이다.  소포클레스(기원전 497/6~406/5)는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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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모티브하여 만든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는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졌었다는 것을 자책하는 것에서 눈을 찔렀었다. 그렇다면 <왕의 남자>에서 그 많은 신체부위 중 연산군이 장생의 눈을 없인 이유는 무엇일까? 밧줄타기를 하지 말라고? 아니다.

바로 공길을 더이상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길을 탐하려는 그 욕망, 욕구를 앗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극에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다. 장생과 연산이 라이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이 광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태 광대로서 승부를 해왔던 연산군이었는데 장생의 눈을 앗아갈 때는 왕의 신분을 이용하여 명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온전히 그의 욕망을 앗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장생은 눈을 빼앗겼음에도 또다시 공길을 되찾으러 나타난다.

+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사랑은 절대 권력으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생의 눈(욕망)을 앗아가봤자 공길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결별한 그들이 억지로 만나는 것은 이뤄질 수 없다. 그리고 그걸 연산이 깨달았기에 장생들 다시 불러와 광대극을 시킨 것이다. 광대극 속에서 정정당당히 그를 다시 되찾기 위해. 여기서 장생이 말하는 대사가 아주 인상깊고 의미가 있는데 한번 곱씹어보면 좋겠다.

광대짓을 할때는 어느 광대놈과 짝맞춰노는게 어찌나 신이 나던지,그 신명에 눈이 멀고,
한양와서는 저잣거리구경꾼이 던져준 엽전에 눈이 멀어,
얼떨결에 궁에 와서는 그렇게 눈이 멀어서, 볼걸 못보고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가는 것을 못보고,



이 대사가 끝나고 곧 중종 반정이 일어나니 연산군은 개입할 겨를도 없이 장생의 승부로 끝이 난다. 장생이 다시 태어나 광대가 되겠다고 하고, 공길도 두 말할 것 없이 광대가 되겠다고 한 것은,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게 사랑을 향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길 또한 장생처럼 겉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동성애를 광대극 속에서 장생에게 표현했던 것이다.

공길의 마음을 눈치챈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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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감
- <왕의 남자>는 감독의 미장센에 액기스가 모두 담겨있는 작품이다. 정말 대단한 실력임에도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을 나 연출 잘해요~ 티낸게 아니라 대단한 절제미로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옷으로 비유하자면 디자인은 물론 뛰어난데 봉제라던가 마감까지 정말 완벽하게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크루엘라>같은 경우에는 나 연출잘해요~ 티를 너무 내서 조금 싱거웠다면 이준익은 그 연출을 발효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거 같다. 존경스럽다.
- 좀 외람되고 건방진 소리일 수 있는데 감독님 요즘 작품도 이렇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솔직히 <변산>이랑 <박열>봤을 때 이름만 빌려줬나 의심스러웠다. 실망스러워서 너무 슬펐다.


+외전으로 <왕의 남자>의 연산군의 행동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내용으로 분석하여 보려고 한다.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요소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1.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2. 어린 아이같은 유치한 모습을 보이는 것
  3.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보이는 것
  4. 자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완전한 결여심을 드러내는 것.

「사랑의 기술」 中 84P


어떠한가? 1번 2번 4번 모두 연산군이 공길에게 보여준 모습과 태도이다. 그리고 광대극과 인형극을 하며 3번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연산군은 공길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신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단지 참고만 하면 좋겠다.

2021.06.02 - [B-ook]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책 제목을 보고 오해할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하자면 이 책에선 연애의 기술따윈 일체 알려주지 않는다.)  이 분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다. '에리히 프롬'은 세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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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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