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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소피 데라스페

by 대담한도약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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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2020)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음에도 원작 인물들의 이름까지 그대로 가져온 독특한 선택을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원작을 향한 대담한 도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이러한 선택은 해당 작품이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의 메세지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단 것을 관객에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기원전 400년대의 어떠한 관념이 2020년의 현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감독의 당돌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보란듯이 계승하였는가? 나는 이 영화의 한줄평을 이렇게 표현하겠다.

가슴의 법은 현대에서도 대중의 마음을 요동시키는가?



(스포주의)


유년시절 할머니와 캐나다로 이민을 온 가족




작 중 안티고네는 캐나다로 이민을 온 가족의 일원이다. 고향에서 지내던 유년 시절,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체를 목도하고 조모와 달아나듯이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원작처럼 부모를 어린 시절에 뉘우고 네 남매가 살아가는 것은 일치하나 현대에서 살아가는 2020년의 안티고네는 왕족도 아니며, 친척의 보살핌도 받을 수 없기에 보호자의 존재로서 조모가 장치되어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조모의 이름은 '메노이케우스'인데 신화 속 메노이케우스는 크레온과 이오카스테의 아버지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테바이의 왕의 포고령보다 신들의 계명을 더 중요시하며 그것은 소신있게 실천한 여인과, 그런 여인을 엄벌하여 신의 노여움을 산 크레온 왕의 비극을 그려낸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올림포스 신들의 계명, 즉 천명이 인간의 율법보다도 엄중하며 존엄하다는 것을 표현해낸 꽤나 직설적이고 소신있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원작이 담아낸 천명에서 주는 어떠한 것은 현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법실증주의'와 대립한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그의 발언이 아닌 행동에서 나타난다.)가 바로 그것인데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2020) 또한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기꺼이 포용하였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효과적으로 선보였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어떠한가?

  • 실정법 vs 자연법

안티고네의 두 오빠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두 작품에서 모두 각기 다른 평판을 소유했다. 원작에서 크레온 왕은 에테오클레스는 조국을 수호한 영웅으로, 폴리네이케스는 조국을 공격한 적으로 간주하였다. 2020년에 와선 형인 에테오클레스는 골 잘넣는 축구선수, 동생인 폴레네이케스는 갱단의 일원으로 설정되었다. 사회적 지위를 통하여 그것을 비슷하게 계승받는 줄 알았으나 나아가 실은 에테오클레스가 갱단의 실세였다는 추가 설정을 통하여 그것을 격파한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표면적으론 에테오클레스에게 총을 쏜 경찰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한 설정으로 파악이 된다. 여기서 경찰은 실정법을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러한 경찰이라던지, 소년원의 직원들을 정의롭게 표현하지 않았다. 오하려 감정적이고 무례하기까지한 작자들로 구성하여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실정법에 고의적인 빈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원작의 크레온 왕의 오만한 고집을 대체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크레온 왕이 가진 정당성과 해당 작품에서 공무원이 가진 정당성은 일치하지 않아보인다. 크레온 왕은 '조국의 이익에 부합하는가?'라는 기준을 가지지만 공무원들은 그러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의 감정적이고 우발적인 행동들로 보여진다. 원작과의 이러한 차이는 고대 절대군주제 때보다도 현대의 실정법이 더욱 오만할 수 있다는 감독의 생각을 방증하는 것 같은데, 자연법의 존엄함을 주장한 소포클레스와 나란히 서면서도 그것을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목적의 이 감독만의 연출로 보인다.

  • 안티고네가 촉법청소년인 이유, 그리고 부작용

하지만 자연법을 연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은 안티고네를 아슬아슬하게 법의 경계선에 놓인 청소년으로 설정하였다. 이것은 가족을 벗어나 자유를 원하는 언니 '이스메네'가 성인인 것과도 연관이 있다. 현대에서의 범법행위는 기록이 남는다. 그렇기에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와는 달리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이스메네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끊임없이 겪는 인물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자연법은 실정법 아래에 굴복하고 만다. 그것은 그녀가 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관객들을 대표할 수 있다. 우리는 실정법이 자연법을 지배한 법실증주의 제도 아래에 살아가고 있다.

반대로 안티고네는 촉법청소년이다. 아직 어른이 채 되지 못한 그녀는 미숙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법에서 자유로우며 자연법을 숭고히 여기기에 충분한 자격을 쥔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자연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태초적인 규범이다. 그러나 그러한 항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적응을 해버리면 인위적인 법 아래에 굴복되는 모순을 가진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작 중 그러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쩌면 실정법이 자연법 위에 선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연출은 작품에게 이중의 날과도 같았다. 촉법청소년이 가지는 특성은 이러한 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해내는데에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나, 청소년의 미숙함이란 특성은 부작용이 되기도 한다.

휴대폰 알람으로 재판 진행을 방해한 친구들


그들의 표현은 이러한 실정법에 대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청소년답게 유치하였다. 그들은 미숙하여 그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어른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작중 하이몬이 만들어낸 '심장이 시킨다.'라는 밈은 하이몬의 진심은 몰라도 안티고네 지지자들의 진심을 대표하기엔 부족했다. 유행, 밈은 진심이란 것과 그것의 뿌리부터 불일치하다. 청소년이란 설정이 이런 부분에선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한 효과적인 연출은 한국의 천만 영화 <변호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


<변호인>의 결말에선 재판에 참석한 모두가 법원을 모욕하지 않고 규칙과 절차를 따라 행동한다. 피고 변호측은 변론을 신청한 변호인이 너무 많다며 방청석에 앉은 그들의 출석 여부를 직접 불러달라고 한다. 방청석엔 모두 변호사 뱃지를 딴 능력있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어른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안티고네>(2020)과 <변호인>을 비교해보았을 때, 무엇이 실정법을 비판하는데에 더욱 효과적이었는가? 자신의 생각에 힘을 싣기 위해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 또한 보유하여야 하는 것이다.

  • 반전 결말

안티고네는 오빠가 지옥같은 고향으로 추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탈옥시켰다. 안티고네는 하이몬이 만든 지지층을 등에 업고 희망을 품지만 그것은 곧장 무너진다. 폴리네이케스가 미국에 잠적하지 않고 동네 주점에서 체포당해오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신력은 곤두박질 당한다. 폴리네이케스의 어리석은 행동을 추가한 것은 자연법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오히려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에서 자연법을 선택한다는 그 무게감을 실감시켜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는 한순간에 무너지지만 절대 가족을, 자연법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조모인 메노이케우스,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함께하기 위해 고향으로 같이 추방당한다. 이스메네가 가족이란 것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 시민권을 위해 캐나다에 남는 것과 달리 말이다. 안티고네에겐 가족이 없다면 시민권과 성공 같은 것은 뒤나 닦을 때나 쓰는 종잇쪼가리에 불과하다. 성공을 위해서 동료와 가족을 저버리면 안된다는 디즈니 영화 <코코>와는 메세지가 동일한 듯하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최종 선택을 미화하지 않음으로써 메세지의 중심은 어느 한 곳에 치우지지 않고 어느 정도 중립을 유지한다.

  • 안티고네는 과연 우리와 달리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인가?

그녀는 폴리네이케스가 체포당한 후 눈이 먼 정신상담사가 나오는 꿈을 꾼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소년원에, 지금의 입장에 있는 이유가 곤란한 선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민권과 오빠 사이에서의 갈등은 가족과 자신의 미래 중의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이 없는 미래는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심판이 산 자들의 심판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하는가는 결코 판가름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원작에서 크레온 왕이 신의 노여움이 두려우나 포고령을 재고할 수 없어 안티고네를 죽이지 않고 석굴 안에 가둬두기만 한 것처럼 말이다.


안티고네는 결코 비범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이스메네와 달리 두려워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어떠한 선택하던가 쉬운 길은 없다. 두 선택 모두 그것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끝까지 안티고네는 지옥같은 고향으로 기꺼이 돌아간 것이다. 우린 대다수를 대표하는 이스메네를 옹호하지도, 안티고네를 옹호하지도 못한다. 단지 연민 또는 씁쓸함을 느낄 뿐이다. 어떤 인물에게 무엇을 느끼는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안티고네 내면의 공포심을 관객에게 드러내보이면서 은연 중에 자연법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원작에서 안티고네는 석굴 안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을 하며, 크레온 왕은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뤼디케를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것에 비탄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죽음과 비탄스런 삶에 우열을 가릴 순 없지만 적어도 크레온은 끝까지 살아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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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감
-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비극임에도 크레온을 온전히 고매한 자로 표현하지 않았다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기준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2020)의 경우도 그러하다.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인 안티고네는 미숙한 존재로써 그녀의 비극에 충분히 메세지를 싣지 못한다. 실정법 vs 자연법이라는 탁월한 갈등소재는 이러한 한계점에 도달하여 아쉽게 막을 내려서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흥미로운 재해석은 재밌었다.


(+ 개인적으로 작 중 두번 나오는 그 이질적인 bgm과 네온같은 효과며 연출을 넣은 것(에테오클레스가 총에 맞았을 때와 폴레네이케스의 범법행위를 표현한 장면) 은 작품의 호흡을 무너뜨려서 너무 거슬렸다. 그게 너무 아쉽다.)




별점 ★★★☆☆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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