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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어댑테이션>과 엮어)

by 대담한도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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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2014)


언뜻보기에 히어로물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실상 관객이 기대하는 그런 블록버스터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코미디? 사실 코미디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딤머등이 켜지면 관객의 뇌 속에 심연같은 고뇌를 심어두고 떠난다. 스파이더맨이 자기자신에 대해 고뇌하는 영웅이라면 <버드맨>은 배우인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 대한 고뇌를 가진 영웅이다.

알레한드로 감독의 작품으로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본 적 있다.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짧게 요약하자면 생명, 생존의 세계에 관한 진중한 고찰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 전작인 이 작품 또한 그런 진중한 고찰로써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그 고찰은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를 스트리밍 사이트인 '왓챠'에서 찾아보면 유사한 영화로 <어댑테이션>이 뜬다. 유명 각본가가 자전적인 내용을 담아 할리우드를 비판한 내용의 작품인데 <버드맨>은 <어댑테이션>의 주제와 명백히 밀접하게 연관된 비판을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댑테이션>의 경우 수작이라고 생각하나 장면 간 전환을 포함, 전개방식과 시나리오 자체에 관하여 대중성과 몰입력이 아쉬웠다. 언뜻보면 생각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버드맨>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카메라무빙만 써서 기다란 롱테이크로 시작하여 끝까지 진행한다. 그로인해 관객은 극한의 몰입감과 현실같은 생생함을 전달받게 된다.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체감되기에 영화를 넘어 연극, 연극을 초월해 흡사 하나의 현실처럼 관객에게 와닿는다. 그렇기에 <어댑테이션>보다 상대적 전달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유사한 점 또한 있다. <어댑테이션>에서 찰리가 현실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쌍둥이 도날드 카우프만을 만들어 등장시켰던 것처럼 <버드맨>은 리건의 과거 배역이었던 '버드맨'이 인지가능한 자신의 이중인격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어댑테이션>의 도날드와 <버드맨>의 버드맨은 전혀 다른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과연 욕구또한 다르진 않는다. 도날드는 할리우드가 원하는 틀에 알맞는 각본가의 모습이며 버드맨은 리건의 본심을 표방하고 내면의 무의식을 표출해내는 인격이다. 도날드의 욕구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는 것이며 버드맨의 욕구는 리건을 영화계로 재귀시키 것이다. 과연 이 둘을 동일하지 않다고 볼 수 있을까? 이 둘의 공통된 욕구는 '편의'다. 물론 찰리와 도날드, 리건과 버드맨의 공통된 욕구는 '성공'이 맞다. 하지만 그 성공의 잣대가 다르다. 찰리와 리건에게 성공이란 자아실현이 없으면 의미없는 것이다. 찰리에겐 탐구욕이, 리건에겐 명예와 자존감이 중요하다. 반대로 도날드와 버드맨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지름길도 마다하지 않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도날드는 식상하고 뻔한 주제로 각본을 쓰고 버드맨은 식상하고 자극적인 히어로물로 복귀하려한다. 상대적으로 예술가에 더 가까운 찰리와 리건은 이들과 내적갈등을 지속적으로 겪는다. 그들에게 도날드와 버드맨은 악마의 속삭임이다.

작품의 끝에서 찰리와 리건은 동일한 결정을 한다. 바로 그들을 죽이는 것. 찰리는 <어댑테이션>의 최후에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마약과 차량추격씬을 추가하여 도날드를 교통사고로 죽이고 만다. 리건은 <버드맨>의 최후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위해 화장실로 걸어간다. 멋진 마스크와 날개, 수트를 입은 버드맨은 그 옆 변기에 앉아 대소변을 보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낭만적이고 블록버스터 액션에나 어울릴 법한 영웅이 극사실주의가 되어 생리현상을 해결 중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리건은 화장실에 그를 남겨두고 나오며 말한다. '잘 있어 그리고 엿먹어.' 버드맨은 그렇게 죽었다. 도날드의 죽음은 마치 찰리가 할리우드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로 보여졌다. 그리고 버드맨의 죽음은 리건이 단순히 작품에 종속된 세속적 인간에서 벗어나 사유할 줄 아는 존엄한 존재로 태어나기 위함이었다.

버드맨 스틸컷

안타깝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댑테이션>과 <버드맨>의 비판은 역설적인 비극으로 끝이 난다. <어댑테이션>은 결국 각본가가 불호했던 마약과 차량추격씬을 엔딩으로 채택했으며 찰리가 바라던 '난초도둑'은 영화화되지 못했다. <버드맨>에서 리건은 피주머니와 소품 총이 아닌 실제 총으로 자신을 쏘아 극을 마무리시킴으로써 비평가에겐 호평을, 대중들에겐 기립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한 그는 자신이 소속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창문 밖으로 투신한다. 리건이 투신한 후, 그의 딸 샘이 뒤늦게 창밖에서 아빠를 찾았을 때 관객은 분명하게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샘은 건물 아래가 아닌 하늘 위를 바라본다. 그리고 환히 웃는다. 마치 리건이 버드맨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기라도 한듯이 말이다. 리건에게는 자살을 하는 것만큼 주동적이고 본연적인 행동이 없던 것이다. 샘이 하늘을 바라본 것은 자살을 옹호하는 메세지가 아니다. 오히려 불행하였던 리건이 자살 외에는 진정한 자신을 되찾을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애도의 표정에 가깝다. 또는 여전히 이런 블랙코미디 영화에서도 초능력이 존재하기를 믿는 무지성 관객들을 위한 마지막 총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배우지망생을 해보았던 사람이라면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리건의 고민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본태적인 증상이다. 이떤 이들은 연기를 하면서 자아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하여 치명적이고도 뿌리깊은 고민을 시작한다. 무엇이 진정한 연기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감정이란 무엇인지, 현상은 또 어떤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의 근본을 파헤치다보면 나락같은 우울감과 절망을 체험한다. 도무지 객관적인 해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버드맨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마이크는 무대에서는 그 누구보다 진짜같은 사람이지만 무대 밖에서는 발기도 되지 않는 누구보다 가짜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발기를 하는 곳은 오직 무대이다. 연기에 미쳐버린 나머지 현실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레슬리라는 여자 무명배우는 오로지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만 꿈이 있는 작자이다. 이 작자는 자존감이 결핍되어 그 밖으론 가치를 찾지 못한다. 하물며 비평가 타비사는 리건이 죽던가 다치던가 극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며 흡족해하기만 하는 소시오패스적인 인물이지 않은가. 게다가 리건의 변호사이자 프로듀서인 제이크는 자신의 직업에 미쳐 동료가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자살시도를 했던 것은 안중에도 없고 연극의 흥행에 흥분에 빠지고만 있다. <버드맨>에서는 그 누구 한 명 제정신인 작자를 찾을 수 없는 작품이다. 모두가 스스로를 정답으로 치부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찾지 못한 채 여러군데가 망가진 인물은 리건 뿐이다. 모두 나사가 하나씩만 빠졌다면 그는 성한 곳 하나없는 고철덩어리다. 그 어디서도 자신의 물음에 해답을 못찾았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반복적으로 한 것이 아닐까. 버드맨은 화려한 브로드웨이와 그 공연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은 무대의 뒷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다. 버드맨은 작품과 배우들의 까뒤집힌 이면의 비극적인 낯짝이다.



▶한줄평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야 했던 무대 뒤의 이야기



별점 : ★★★★☆ 4.5

▶후기

작 중에 리건은 비평가 타비사에게 가서 폭언을 쏟는 장면이 있다. 리건은 타비사의 비평에는 낙인과 이해안가는 말뿐이라며 꽃한송이도 낙인없이는 표현못한다며 그녀를 비판했다. 니코스 카잔자스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저주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영감이 떠올라 무언가 표현하고 싶을 땐 춤을 춘다. 인간에게 가장 쓸모없는 것을 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춤으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비평가나 평론가, 작가, 기자 그 직업이 무엇이 되었건 글을 쓰는 사람이 작업을 하며 심혈을 기울일 것은 오직 하나이다. 그 대상을 단어 속에 가두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말이다. 글쟁이들은 최선을 다해 글이 가지는 가학성을 인정하고 경계하며 대상을 보호하려 애써야한다. 최대한 불씨를 살린 채로 타인에게 생각이나 정보를 전달해야하는 것이다.

그와 공통된 생각으로 배우는 그보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글 속에 갇혀 죽어가는 불씨를 발견하고 연구하여 되살려낸다. 마치 의사처럼 말이다. 글쟁이들은 대상을 죽이지 않은 채 최대한 신선하게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며 배우는 죽어가는 것을 최대한 소생시켜 체득해내려고 한다. 다름이 아니라 최고의 전달 방법을 양측 다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리건이 타비시에게 내밀은 꽃 한송이를 묘사하는 것은 배우 쪽이 더욱 생생하리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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