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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테아 샤록

by 대담한도약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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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미 비포 유&gt;(2016)


전신 마비로 휠체어를 탄 불행한 주인공을 구원해주는 뜻밖의 인연을 소재로 하는 명작을 기억하는가?
<언터쳐블: 1%의 우정>(2012)는 돈많은 재벌 백인과 가난하지만 유쾌한 흑인이 우정을 쌓아 불행을 극복하는 작품이다. 상당한 수작으로 혹시 아직 보지 못했다면 꼭 한번쯤 시청해보는 것을 권장한다.

소재는 동일하다. 대신 <미 비포 유>는 불행한 휠체어남은 젊으며, 그를 보조해주는 우연한 인연은 수다스럽고 패션이 우스꽝스러운 여성이라는 점이다. 솔직히 로맨스영화다보니 작품의 목적지는 너무나 뻔하다. 그럼에도 인생의 좌절기에 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감독은 어디에 무게중심을 실어 우리에게 작품을 선보였는지 나름의 의견을 말해보려고 한다.

(+편향되고 굉장히 주관적인 격양된 주장을 할 생각이니 참고하였으면 좋겠다.)





(스포 주의)



루이자는 6년동안 일한 가게가 폐업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새로운 일를 찾는다. 집안의 밑닦음을 해야하는 루이자는 특별한 경력도 기술도 필요없으며 게다가 수당도 높게 쳐주는 일을 소개받는데, 그것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가 보조할 대상은 주인공 윌로, 한 때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허나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 마비가 오게 된 그는 삶의 좌절을 겪고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가족은 그를 위해 마굿간을 개조하여 별관을 지어주었는데, 자기방어기제로 괴팍하고 재수없는 말투와 성질을 보이곤 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설정으로, 수 많은 작품들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다가 사고로 인해 전신 마비가 온 인물들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굉장히 흔한 스타트. 굉장히 흔한 여주의 설정. 그러나 로맨스 영화라는 점에서 나름의 차별성은 가져갈만 했다.

윌의 괴팍한 성격은 발랄하고 긍정적인 루이자와 함께 있어선지 점점 마음의 문을 열었는데, 솔직히 필자가 보기에 루이자가 한 것은 그닥 많아보이진 않는다.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 전전긍긍 그의 곁에 있어줄 뿐이었다.

<언터쳐블:1%의 우정>에서는 전신마비장애인을 보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사명감이 필요한 것인지를 확실히 표현하고 어필한다. 그리고 도우미이자 주인공인 드리스가 얼마나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지를 보여준다. 드리스는 장애인 필립에게 어떠한 영향력과 파급력을 주게 될지를 명확히 관객들에게 인식시킨다.

그에 반해 <미 비포 유>에선 어떤가? 모든 것이 생략되어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사랑을 아름답게 미화해내기 위해 전신마비를 보조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전혀 표현해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추락한 윌이 얼마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지를 표현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절묘하게 그려냈는가? 그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흘려들어도 좋다만 솔직히 영화에 무게 중심이 잡혀있지 않았다. 테아 샤록 감독은 다만 루이자는 휠체어를 탄 불구자도 사랑에 빠질만한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을 나타낼 뿐이었다. 그리고 루이자는 불구자도 차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선한 인물이다. 이걸 표현했을 뿐 소재의 신선함을 전혀 응용하지 못했다. 혹평일지 몰라도 난 왓챠피디아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신박하고 달콤한 짬뽕에서 풍겨나는 자유와 존경의 향기

이 각본을 다룰 각오였다면 감독은 다음 중에 무게 중심을 어디에 실을지 결정했어야 했다. 어쩌면 두마리의 토끼 모두 거머쥘 수 있었다.

1. 추락한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한 전신마비자의 삶, 그리고 안락사
2. 장애를 극복한 헌신적인 루이자의 사랑이야기

1번을 가져갔다고 하기엔 이 작품에서의 카메라는 순전히 루이자의 중심으로 돌았다. 윌이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윌이 밤새 어떠한 꿈을 꾸는지 아침에 어떠한 기분으로 일어나는지, 추락한 그의 삶은 어떠한지 단 하나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독자들에게 제공한 적이 없다. 간략하게 사진첩 몇장, 이야기 몇 마디, 표정, 대사 몇번. 이걸 관객들에게 음식이라고 접시를 들이밀기엔 너무 불친절하다. 그는 스크린에서 단지 자기방어기제로 가시를 뾰쪽세운 고슴도치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관객이 진정으로 윌의 심경과 사연을 이해하지도 않았는데 루이자의 감정에 몰입하고 공감하라고? 말이 안된다. 그래놓고 달콤한 말 몇마디로 로맨스 영화인 척해봤자 이미 맛은 변질됐다. 뭐 이것도 입맛인 관객들도 존재할 것이다.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2번에 무게중심이 잘 실려있다고 받아들인 관객들일 것이다. 좋다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바라보자. 루이자는 원래 7년동안 사귀었던 패트릭이란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올해의 청년 사업가'라는 호칭이 있으며 운동을 사랑하는 열혈남이다. 하지만 작중에선 자기중심적이며 여친의 취향이라곤 열흘도 안본 윌보다 모자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패트릭의 캐릭터성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독의 편향된 연출이 패트릭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인물에 대한 모함이다. 개인적으로 루이자가 윌과 바람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연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루이자는 패트릭과 진심어린 대화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진지한 대화나 식사자리 한번 찍혀진 적 없었는데, 그렇게 괴팍했던 윌과도 친해지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놓고 7년동안 알고 지낸 남친을 그렇게 무관심하게 상대할 수 있나?

어린시절 좋아했던 스타킹을 윌에서 선물받았다.


패트릭에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있는지 말해준 적 있었나? 루이자는 뭐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데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끔 장치하였냐는 것이다. 전혀 그럴 기미도 의도도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패트릭은 이 영화 속에서 생명력이 없다. 단지 루이자가 왜 윌을 사랑해야하는지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패트릭은 그런 포지션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애인이었던 루이자는 패트릭 앞에선 그저 감독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 때만큼은 루이자에게도 생명력이 없었다.

윌과 별빛 아래 노상온천을 간다는 루이자에게


루이자는 윌과의 여행을 패트릭에게 설명하기를, 안락사하려는 윌을 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변명한다. 루이자는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사랑이 식었든, 새로운 사랑에 불이 켜졌든 이것은 7년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준 한 사람에 대한 예의이며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연인에게 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루이자는 항상 패트릭에게 무례했다. 이런 대목에서 어떻게 루이자가 단지 윌 앞에서 빨간 드레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여주인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겠는가? 힘든 일이다.

캐릭터의 생명력이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감독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은 살아있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더욱 무대에서 자유롭게 활개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커' '할리 퀸' '배트맨' 등등 유명하고 인기있는 캐릭터들은 그들만의 개성과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루이자는 단지 감독이 연출하는대로 이끌려다니는 인형에 불과했으며 패트릭은 스토리에 불가피하게 들어간 도구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 가장 캐릭터성이 특출난 윌은 여성들이 좋아할 달콤한 대사를 던질 뿐 그의 과거사라던지 감정이라던지 전혀 세세하게 표현하지 못했고, 그것들은 표면적으로 스크린 속에 떠다닐 뿐 관객들의 심금에 닿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그나마 감독이 사랑했던 캐릭터가 누구였는지 유추해본다면 아무래도 '윌'인거 같다. 그런데도 작 중 비중은 꼭두각시인 루이자가 다 가져갔으니 무게 중심없이 영화가 무너지는건 당연한 결과다.

열등한 시인은 무능해서 구성하고, 훌륭한 시인은 배우들에 대한 배려에서 구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中

「수사학/시학」-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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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안락사를 맞이하는 윌



결말은 예상 외의 길로 걸어가는데,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낼거 같았던 윌과 루이자는 이별을 선택하고 만다. 이것은 윌이 자신의 휠체어 처지를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일어난 결과인데, 루이자의 부모님은 이러한 선택을 방관하는 것이 살인행위라고 표현한다. 여행을 갔다오고는 윌이 어떻게 되던가 휙하고 집으로 와버린 루이자. 그녀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스위스까지 날아간다. 당연히 안락사를 저지하러 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윌의 선택을 존중해준다.

이 영화는 사랑이며 철학이며 자유와 존경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 루이자가 바람을 피던 패트릭을 어떻게 방관하던 상관하지도 않는다. 감독은 이것을 존중해준다. 지지해주는게 옳은 표현일지 모른다. 또한 윌의 안락사 마저 존중해주는 그의 주변인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지 그들은 안다. 그렇기에 그를 놓아준 것이다.(관객은 잘 모르겠지만말이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루이자와 윌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은 서로를 존경해주었기 때문이다. 윌은 루이자의 독특한 패션스타일이며 수다스타일이며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었다. 그리고 루이자는 윌의 상태와 처지가 어떠하였든 그를 사랑해주었다.  패트릭은 이것에서 윌에게 패배하였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패트릭을 자기중심적이고 여친의 취향도 파악할 줄 모르는 인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감독은 루이자의 바람 또한 존중해주었다. 그것뿐인가 루이자의 동생이 대학을 간다고 하자 루이자는 자신이 그 짐마저 들게 될 것을 알지만서도 동생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은가.

결말에가 윌은 루이자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준다. 그러면서 말한다. '자신의 길을 가세요. 자유롭게 사세요.' 안락사한 인물이 할만한 대사이다. 온데간데에서 자유와 존중의 향기가 코를 계속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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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감

이것은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장면에서 존중과 자유를 거론하는 것은 관객이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 작품의 피날레에는 윌의 안락사가 있다.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마지막 여운을 책임지는 것인데, 다소 소란스러운 바람에 그것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정말 안타까울 지경이다. 좋은 소재와 좋은 캐릭터들이라고 생각된다만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 고작 달콤한 짬뽕이라니. 너무나도 아쉽다.

윌이 사망한 후 프랑스에서...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사랑이야기도 안락사도 아니다. 바로 자유이다. 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자유가 없었던 루이자는 윌을 만나 어릴 적 잃어버렸던 줄무늬 스타킹(자유)를 되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은 이치에 맞지 않다. 패션스타일을 고집하는 것과 윤리적인 선택에서 자유를 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같은 그릇에 담아내다니. 음식에도 조합이 있듯이 철학적인 소재에도 이러한 것은 중요하다. 더욱이 윤리나 철학은 인간의 삶을 논하는 문제가 아닌가. 그 누가 줄무늬 스타킹을 마음껏 입고 다녀도 난 그것을 존중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문제에서 그것을 논하는 것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것이 안락사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별점 : ★★☆☆☆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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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비포 유의 OST는 Ed Sheeren의 Photograph 와 Thinking out loud 이다. 이 음악들에게는 별점 5점을 주고 싶다. 정말 좋은 노래들이다.)

(+이 영화의 명대사들을 사랑하고 이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분들에겐 혹평을 남겨 죄송하지만 과연 패션의 자유와 윤리적, 철학적 선택이 과연 같은 선 상에 놓여질 수 있는지는 한 번 곱씹어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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