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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주근깨 공주> - 호소다 마모루

by 대담한도약 202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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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주근깨 공주 - 호소다 마모루


<시간을 달리는 소녀>, <괴물의 아이>, <늑대 아이> 등 수많은 수작들을 만들어낸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새 작품 <용과 주근깨 공주>가 9월 29일에 막 개봉하였다. 앞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를 이끌어갈 일본의 거장 애니메이션 감독이기에 기대가 많았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노래로 비유하자면 발성이 단전 아래에서부터 잘 쌓아올려서 내뱉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천천히 쌓아올려지는 떡밥같은 여러 요소들을 차근차근 잘 해소해 나갔으며 그럼으로써 관객은 영화에 쉽게 몰입하고 감정을 쌓아올려 마지막에 도달해 끝내 분출할 수 있어 좋았다.

용과 주근깨 공주 예고편


예고편을 보면 이 작품의 주 관람 포인트는 '벨'이 부르는 노래와 메타버스 세계의 시각적인 요소들을 무기로 가져온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작화 또한 감독의 과거작에 비해 월등히 상향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배경과 사물들은 물론이며 가령 '벨'의 경우 일본 고유의 2D감성과 3D기술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과거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썸머 워즈>도 <용과 주근깨 공주>처럼 가상세계를 다루었던 작품인데 그것의 작화와 비교해보면 아예 프레임 수가 다른 것처럼 느껴질만큼 부드러움이 확연하게 차이난다.

'스구'라는 이름의 촌구석에 사는 주근깨 여고생은 친구의 권유로 전세계 50억명의 유저를 가지고 있는 U라는 가상공간에 AS라는 자신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된다. 그 캐릭터의 닉네임은 'Bell'. 그녀가 등장한 후 인지도를 얻자 그녀의 닉네임에 관해서 사람들은 Bell 에서 e를 붙여 프랑스어로 '아름다움' 을 상징하는 'Belle' 가 더 어울린다고 말하는데, 그 후로 벨의 스펠링은 'Belle'가 된다.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Belle'는 동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공주의 이름이기도 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혹시 <미녀와 야수>의 내용을 모른다면 꼭 먼저 시청한 후에 <용과 주근깨 공주>를 관람하기를 권장한다. 아무래도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듦에 있어 <미녀와 야수>에서 많은 영감을 가져온 흔적이 보였다. U의 세계와 현실은 분명 다른 공간이지만 그럼에도 U의 AS인 벨과 현실의 스즈를 다른 인물이라고 볼 순 없다. 마치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사실은 저주에 걸린 잘생긴 왕자님인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 리뷰를 쓰는데에 있어서 이 부분을 특히 파고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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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 영화의 첫번째 주제 '사랑과 소외의 까닭'

영화는 스구의 불우한 과거 등 그녀의 배경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시작한다. 적어도 자존감이 낮은 그녀는 사랑받는 자가 아니다. 학교 얼짱 '루카'와 스구의 소꿉친구 '시노부'는 훤칠하고 잘생기고 예쁜 까닭에 학우들에게 인기가 많다. 사랑받는 자들에게는 '외모'라는 확실한 까닭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소외받는 자들은 비교적 타당한 까닭이 없다. 스구는 음울한 기운과 주근깨를 가지고 있기에 인기가 없다. 카누부를 사랑하는 남학생, '치카미'같은 경우에는 남들과 다른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행동이 방정맞은 까닭에 인기가 적다. 스구의 친구는 스구의 자존감을 올려주기 위해 스구에게 가상세계 U를 소개시켜준다.

스구는 현실에서는 자존감이 낮아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자신의 부담감에 토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상세계의 '벨'은 누가봐도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녀는 U 속에서 누구보다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고 순식간에 엄청난 팔로워를 거느리게 된다. 그녀를 바꾸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외모이다. '벨'의 아름다운 외모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있기에 그녀는 당당하게 노래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로 돌아오면 제대로 노래부르지 못한다. 이러한 빌드업을 통해 자연스레 관객은 사랑받는 핵심조건을 외모, 즉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터넷 속 아줌마는 타인에게 비춰지는 모습을 거짓말을 해서라도 예쁘고 단란한 가정이 있는듯이 SNS를 꾸민다.

미움받는 조건은 반대로 못생겼기 때문으로 묘사된다. 아름다운 벨과 달리 '용'의 경우 흉측하기 때문에 미움받는다. 분명 모든 미움에는 어느정도의 잘못된 정당성이 있다. 스구는 음울하고 주근깨가 있기 때문에, 치카미는 인기없는 카누부이기에, 용은 외모가 무지막지하고 행동이 무자비하기 때문에 말이다. '용'의 경우 애초에 싸움꾼의 기질을 품고 무도장에 등장한 AS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무도가가 싸움 좀 했다고 미움을 받을 순 없다.

그리고 감독은 마냥 관객이 외모와의 상관관계를 단정짓게 두지 않는다. 벨이 등장할 때는 뛰어난 노래실력와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시기하는 무리를 틈틈이 조명하였으며, 용의 경우 흉측하고 무자비하지만 그를 응원하는 무리를 조명하였다. 감독은 좋아함에도, 미워함에도 어쩌면 정당한 이유는 없다고 우리에게 은연 중에 속삭이고 있다.

 

  • 용의 등장과 메타버스의 <미녀와 야수>

벨과 용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 하면 자연스레 동화 <미녀와 야수>의 벨과 야수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들의 연관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구의 벨과 미녀 벨의 스펠링은 동일하게 'Belle'이며 용의 경우 야수와 동일하게 흉측한 외모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성에 홀로 지낸다. 그리고 그곳엔 움직이는 주전자와 촛대를 대신하여 아기자기한 AI가 용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 성을 유일하게 도달한 것은 바로 '벨'이다. 그리고 그곳의 한구석엔 장미가 가득하다. 이와 같이 용이 등장한 이 후론 이야기의 거시적인 흐름은 완전히 <미녀와 야수>의 플롯과 유사한 노선을 타게 된다.

호소다 마모루는 무엇을 통해 <미녀와 야수>를 재해석하였을까? U의 AS들은 정의라는 명목 아래 <미녀와 야수>의 마을의 주민들처럼 무식한 이유로 용을 언베일시켜 U에서 추방시키려고 하는데, 여기서 오히려 언베일되는 것은 용이 아닌 스구의 '벨'이다. 여기서 <미녀와 야수>의 벨과 <용과 주근깨 공주>의 벨의 차별점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후 <미녀와 야수>의 벨은 쉽게 미녀 벨, <용과 주근깨 공주>의 벨은 U의 벨이라고 칭함.) 사실 U의 벨의 경우 미녀 벨과 달리 아름다운 외모는 가상일 뿐, 현실의 스구는 촌구석의 별볼일없는 주근깨 여고생이다. <미녀와 야수>의 경우 성의 사람들이 외모가 변한 것은 요정의 '저주'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스구에게 U의 벨은 마치 <신데렐라> 속 요정의 마법과 같은 축복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노래를 부르고 인기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왜 그녀는 마법의 유리구두를 벗고선 자신의 정체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보였을까?

작품의 초반엔 분명 사람들에게 받는 사랑과 뛰어난 외모를 축복처럼 묘사하였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U와 현실의 대중들의 행동에 무지성과 맹목적인 추종적 성격을 부여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자연스레 형성시켰다. 벨은 작 중 후반에 U의 대중들에게 감싸져서 행동에 제약이 걸려 괴로움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용과의 소통에 있어 AS같은 가상캐릭터의 모습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초반엔 분명 축복, 마법과 같은 것이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저주가 되었던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관객이 가장 긴장하면서 관람한 포인트는 '남녀가 껍데기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이다. 이것에 있어서의 트러블 지점은 야수가 흉측하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용과 주근깨 공주>는 유사하지만 정반대이다. 이 작품에서의 후반 포인트는 '남녀가 껍데기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것에 있어서의 트러블 지점은 '벨'의 현실은 사실 보잘 것 없다는 점이다. 두 작품의 남녀의 입장이 반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독의 가치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작품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일본의 '어느 거장 감독'이 작품 내에서 여성을 끊임없이 '신성화'하는 것에 있어서 환멸을 느끼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다고 하였다. 여성은 특별할 필요가 없으며 우수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현실에서도 그러하다.<용과 주근깨 공주>의 메인 주제는 아니지만 사실 바탕에는 그러한 감독의 가치관이 기인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미녀와 야수>와 동등하게 <용과 주근깨 공주>또한 외모로 편견을 가지는 대중들의 행동을 비판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이 '그것을 누구에게 외치는가'는 전혀 다르다. <미녀와 야수>의 경우는 주제의 메세지를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 그러나 <용과 주근깨 공주>의 경우 대중들의 무지성이 아닌 스구와 같이 소외된 특정 인물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사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효과인 것이다. <미녀와 야수>의 경우 비판과 각성이 목적이라면 <용과 주근깨 공주>의 경우 응원과 격려가 목적인 것이다. 스구는 '벨'의 모습을 언베일했음에도 어째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야만 한다.

그녀에게 '벨'의 모습은 하나의 알이자 세계와 같았다. '벨'은 스구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품어주었으나 동시에 그녀를 한정짓고 벨의 모습 안에 가둔 것이다. 왜 U의 대중들은 스구에게 동요하였는가 를 묻는다면 답은 뻔하다.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성있는 그녀의 모습이 노래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타깝지만 무지성 악플러들은 존재했고 말이다. 감독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대중들의 무지성에 개의치말라 하고 있다.

  • '사랑과 소외' 두 무리의 합일

일본 작품에서 내적 성장을 상징하는 뭉개구름은 작 중 두번 등장한다. 바로 소외된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합일을 이룰 때이다. 얼짱 루카는 카누부의 치카미를 좋아한다. 그리고 소꿉친구 시노부는 주근깨 스구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받는 자임에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약자가 되어 조심스러워지고 만다. 스구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였다. 대중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사랑하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외된 자였지만 어쩌면 그녀보다 더 소외된 학대받는 아동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원히 사랑받는 자도, 영원히 소외되는 자도 없다. 단지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인터넷 속 아줌마처럼 말이다. 필자는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과 소외'라는 이분법적인 불안함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을 찾아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 소감

- <썸머워즈>에서 가상현실을 다뤄보았기에 굉장히 능숙해보였다. 또한 단지 동화스럽게도 아니라 현실적인 부분과 어느정도 타협을 해나가며 결말까지 도달하였기에 신랄한 부분이 터프해보여서 맘에 들었다. 필자는 <미녀와 야수>에서 영화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해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야수가 대중들에게 환멸을 느낀다면 요정에게 벨만 있으면 되니 자신의 모습이 야수건 왕자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었을거 같다고 느꼈다. <미녀와 야수>를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 점이 굉장히 신박해서 맘에 들었다.

(참고로 클리오네의 모습을 한 천사 AS의 정체는 용의 현실 동생이다.)

 

 

+ <썸머 워즈>의 글에서 <용과 주근깨 공주>를 한번 더 언급했기에 기회가 되면 찾아보아도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다. 

 

<썸머 워즈> - 호소다 마모루 (<용과 주근깨 공주>와 함께 바라본 호소다 마모루의 변화)

 21년 9월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미녀와 야수>에서 영감을 받은 메타버스 영화, <용과 주근깨 공주>를 내보였다.(해외에선 로 개봉하였다.) 호소다 마모루는 2009년에 이미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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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평


저주의 문제는 이제 야수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저주는 마법이 되었다.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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