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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 되기> - 스파이크 존즈

by 대담한도약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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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 되기(1999)


포스터부터가 굉장히 기괴하면서 어쩌면 섬뜩한 느낌까지 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정직하고 직관적인 포스터가 또 있을까? 포스터가 가져다주는 이 감정 그대로 관객들은 러닝타임 내내 계속 느낄 수 있다.

어떠한 개인이 타인에게 빙의가 되는 것은 이젠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굉장히 특별하다. 무엇보다 빙의가 되는 대상이 하나의 특정성이라던가 인과성을 가진게 아니라 온전히 유일한 한 사람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바로 '존 말코비치'이다. 작품의 시놉시스는 왜 하필 수 많은 사람 중에서도 '존 말코비치'인가를 납득시킬 생각이 없다. 강압적이기도 한 이러한 연출은 신비롭기도 하며 기이한 기분을 주는 것만 같다.

※ 이 작품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은 실존인물 '존 말코비치'의 불가지성’(unknowability)때문에 이 작품은 그 누구도 아닌 존 말코비치의 이야기여야 한다고 고집했단다. 존 말코비치가 궁금하다면 아래 기사로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trans × cross] 말코비치, 말코비치? 말코비치!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먼은 <존 말코비치 되기>가 다른 어떤 유명인사도 아닌 존 말코비치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성(姓)의 발음도 발음이지만 (남녀노소가

www.cine21.com




단연코 이 작품은 가장 기괴하면서도 몰입력이 극강하다. 독창성으로는 유일무이하게 우월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스포주의)

※ 작품이 명확한 의도를 담고 있지 않기에 분석과 함께 추측과 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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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가 아니면 누구의 이야기가 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누가 되었든 자아를 파고드는 강렬한 이야기는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주인공인 '크레이그 슈와츠'의 인형 조종사란 직업이 스토리텔링에 극적이고도 효과적인 전달력을 장착하도록 도와주었다는 점을 본다면 그 인물은 이와 유사한 직업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좋아보인다. 그래서 빙의가 될 인물의 직업이 배우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 크레이그의 인형극

영화는 크레이그의 인형극으로부터 시작한다. 인형은 거울 속 자신을 보게 되는데 자신을 매달아놓고 조종하는 인형사의 존재를 알게 되자 충격과 울분을 토해내며 절망한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잠시 그와 대조되는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무용을 선보인다. 이 인형극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육체와 자아를 분리시키지 않고 그것이 일치한다고 인형 본인이 그렇게 믿는 것, 또 그것을 당연시 여겨 평소 의식조차 안했다는 것, 분리된 자아(인형사)를 목격한 것, 마지막으로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 자아(인형사)의 조종에 의해 의지와는 다르게 화려한 춤을 추는 것. 이 인형극은 곧 이 작품의 메인 디쉬를 모조리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형극의 이름은 '크레이그의 절망과 환멸의 춤'이다. 크레이그가 직접 만들어낸 이 인형극은 작 중 단 두 번 나오게 된다. 첫번째는 인형에 실을 매달아서, 두번째는 존 말코비치의 몸에 빙의한 채 그를 조종하여 선보인다. 이로써 인형이라는 물체와 존 말코비치라는 한 사람, 혹은 육체라는 것이 동일선 상에 견인되고 만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식이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충분히 너무나도 그것이 가능하단 것이 납득되고야 만다. 그들은 신비로운 문을 통해 말코비치의 자아를 체험할 수 있었고 심지어 크레이그는 그를 인형처럼 조종했기 때문이다.

  • '7과 1/2 층'과 '신비한 문'

아내의 등쌀에 어쩔 수 없이 크레이그는 인형극을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그렇게 면접을 보러간 곳은 7과 1/2층이라는 애매한 주소. 그 곳은 7층에서 8층으로 가는 순간 비상정지버튼을 누른 후 억지로 문을 개방시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신비한 문'은 타인의 자아를 15분간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우스꽝스럽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7층도 아니고 8층도 아닌 것은 마치 우리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하나의 심리학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의 의식을 아래와 같이 세가지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프로이트의 인간의 의식 구조



수면 바깥의 의식, 수면의 전의식, 수면 아래 깊숙한 무의식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바로 수면 바깥의 의식(Conscious)이다. 무의식(Unconscious)은 인식할 순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여 우리의 의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의식의 영역이다. 전의식(Preconscious)은 이 두 영역을 연결시켜주는 것으로 의식하고자 하면 충분히 인식가능한 영역이다. 이렇게 세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여 우리의 의식이 구성된다고 프로이트는 말하였는데 이 심리학 개념을 참고하여 본다면 7과 1/2층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는 전의식의 영역이라는 것을 쉽게 관철할 수 있다.

나아가 그렇다면 신비한 문은 어디로 가는 문일지도 이것을 적용하여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엘리스가 호기심에 들어간 토끼굴이 연상되는 이 문은 한번 경험하게 되면 결코 이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을 제공한다. 바로 자아를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의식의 영역 마저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타인의 오감과 젠더마저 경험할 수 있는 이 경험에 인물들은 중독되고 만다.

경탄스러운 것은 스파이크 존추 감독은 결코 인식론과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자아는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 대신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날 것 그 자체의 반응을 보여준다. 감독은 질문하여 답을 유도하지 않는다. 스스로 궁금하게 만들고 질문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되려 더 탐닉하게 만든다. 문에 중독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오브젝트이면서도 유일한 취약점이다. 문이 없으면 전개는 전혀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다. 7과 1/2층도 더이상 매력적이지 못하며, 인형 조종사라는 설정도 무의미해진다.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진 이 신비로운 문은 인물들이 결코 부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이 문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찾는다. 그리고 이루어낸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젊음을, 누군가는 재물을 말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 문을 통해 피해를 입고 공포에 빠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존 말코비치' 본인이다. 누군가 자신의 자아를 침해한다는 것을 알게 된 말코비치는 직접 문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자아 속을 들여다본 말코비치


모든 사람이 말코비치의 얼굴을 하고 대사라곤 '말코비치'라고 밖에 안하는 세계, 말코비치 본인은 혼란과 충격에 빠져 그 곳으로부터 달아난다. 그리고 크레이그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보아선 안될 것을 보았어요. 그 문은 내 것이예요. 문을 폐쇄해야 해요.' 문을 없애자고 하는 사람은 말코비치 본인이 유일하다. 다른 이들은 타인의 자아를 헤집고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 일체의 도덕성없이 공포스러울만치 무례하다. 그렇다면 왜 말코비치는 자신의 자아를 무서워했을까?

  • 영화 속 말코비치의 내면 세계

말코비치가 바라본 자아 속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말코비치가 목격한 모든 이들이 말코비치 본인이라는 것, 둘째로 세상 모든 사람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 두가지 가설은 뜻의 본질을 회귀해보면 일맥상통한 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아내 '라티'와 직장동료 '맥신'이 동시에 문을 들어갔을 때 말코비치의 세상에 대해서 확립할 수 있다. (이 때 보이는 연출은 마치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 <이터널 선샤인> 속 기억의 맵 세계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녀들이 헤집은 것은 말코비치의 잠재의식 속, 즉 무의식의 기억 속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말코비치가 목격한 '말코비치들'의 가설은 전자의 것이 되는데, 그곳에 위치했던 모든 모습들이 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자아(ego)이며 원초아(Id)라는 것이다. 단지 지금의 모습, 현생의 모습이 남성이며 배우인 말코비치의 모습일 뿐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가는 정답이 있지 않다. 하지만 말코비치가 자신의 내면을 경험했던 것은 타인이 말코비치를 경험한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 타인의 경우 그것을 간접체험함으로써 상상할 수 있지만 말코비치의 경험은 이례 가늠이 안되는 것이기에 어떻게 본다면 유일하게 감독이 관객에게 대답을 유도하는 연출일지 모른다. 감독은 말코비치의 입을 빌려 그것을 세계의 어두운 면이며 폐쇄해야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유추할 수 있을까?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고 그것을 어두운 면이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필자는 수 많은 말코비치들을 작 중 마지막 장면과 연관시켜 유추하여 보았다. 크레이그를 채용한 '닥터 레스터'는 다음 생을 함께할 수많은 동료들을 매 생에 모집하여 함께 문을 통과하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하나의 육체에 수 많은 자아들이 제약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맥신'이 문을 이용해서 추진한 사업에서 15분 동안 단 한명의 손님만 문에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이 연출을 통하여 감독은 관객들이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자아만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의도하였다. 사실 누군가가 말코비치 안에 들어갔을 때부터 복수의 자아가 존재하는 셈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문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육체에 하나의 자아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가 유추하는 바가 이것이다. 말코비치가 목도한 바는 자신의 육체 안에 수많은 자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육체의 주인이 본인이라고 착각하였던 남성이자 배우인 말코비치가 절망과 환멸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인형과 말코비치의 차이

이렇게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면 관객 또한 자신의 자아에 관하여 환멸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육체는 인형이며 자아는 인형을 조종하는 조종사이다. 이것은 작 중에선 기정사실이된 가설이다. 그리고 인형의 경우 단 한명의 조종사만이 존재하지만 다른 조종사의 손에 인형이 들어갈 수도 있는 법이다. 인형의 주인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또한 육체의 경우 셀 수 없이 다양한 자아가 내면세계에 웅크리고 존재한다. 그들은 독립적이며 일제히 개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육체를 빼앗긴다는 것도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그마저 말코비치의 얼굴도 아닌 자에게 빼앗겨버리고 마니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이러한 연출은 말코비치의 주인은 굳이 말코비치가 아니어도 된다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은 언제든 타인 또는 본인으로 인해 죄책감없이 휘저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을 주는 듯 하다. 내가 나라고 느껴야만이 나의 감정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자신의 자아를 목도한 후엔 내 감정이 명확히 나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수없이 많은 내면의 조종사의 것이다. 적어도 육체가 느끼는 감정은 아니란 것이다. 단지 '나'와 '육체'를 동일시한 착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안타깝게도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인형과 육체를 구분지을 수 있는 빌미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형과 육체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설정 속에서도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찰리 카우프만과 스파이크 존추가 주장하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데카르트의 사상에 대적하는 새로운 무언가이다. 이 영화를 보고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아의 개념을 일반화시키게 되면 관객은 자신의 자아 또한 성찰하고 의심하여야 한다. 나아가 열등한 인간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비등한 결말로 끝나니 이것은 비극적인 희극이다.



▶소감

말코비치의 내면세계를 통해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의 맵이 연상되었으며 개인의 육체에 타인의 자아가 들어간다는 것에서 <겟 아웃>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하나의 육체에 수많은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아이덴티티>와 같은 다중인격 영화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과연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이러한 장르에서 단연코 최고의 평판을 받아 마땅한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의 결말이 일반적으로 관객이 좋아하는 깔끔한 마무리는 아니지만 이러한 결말이 <곡성>처럼 찝찝하지만 그 작품성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서사였다. 가히 이를 넘을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한줄평

전의식과 자아를 다루는 가장 괴로운 영화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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