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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크레이그 질레스피

by 대담한도약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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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크루엘라>는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1961)>의 악역 '크루엘라'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21년 2분기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를 잇따라 극장으로 관객들을 끌어모으는데 이바지한 작품이다.

 크레이그 질레스피란 감독은 마고 로비가 주연이 되었던 <아이, 토냐>라는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토냐 또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는데, <아이, 토냐>와 <크루엘라>를 비교하여 본다면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이 천재들이 명성을 얻는데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의 <아이, 토냐>에서도 <크루엘라>에서도 천재들에게는 항상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맡는 역할은 천재들의 재능만큼이나 중요한데 <아이, 토냐> 또한 좋은 작품이니 크루엘라를 시청한 후 감독의 스타일이 맘에 들었다면 <아이, 토냐>도 한번 보셔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이, 토냐> - 크레이그 질레스피

<아이,토냐>는 2018년도에 나온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의 작품이다.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은 최근 디즈니 영화 <크루엘라>의 감독을 맡았기도 하였는데, <크루엘라>를 시청한 후 이 감독의 성

hellobrofriend.tistory.com

 

 

 


(스포주의)



*상황에 맞게 주인공을 크루엘라 또는 에스텔라라고 부름

크루엘라는 태어날 때부터 좌우 흑백의 독특한 헤어스타일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연민, 따돌림을 받았다. 이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은데 작중에선 그녀가 지닌 천재성과 광기를 상징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헤어스타일은 그녀는 절대 평범해질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태생부터 콧대가 높아 절대 굴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따돌리는 남학우들과 싸움을 일삼는 문제아가 되어 학교를 퇴학당하게 된다. (퇴학시키기 전에 자퇴를 선언하긴 했다.) 어머니는 성격이 강하고 주장 확실한 그녀가 사회에 어울려 살 수 있도록 교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그녀에게 조언한다.

 

 

'넌 크루엘라가 아니라 에스텔라야.'

 

 그녀는 어머니의 말대로 에스텔라가 되어 착하게 살기로 맘먹는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어머니와 에스텔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 안의 사고뭉치 크루엘라의 성격은 계속해서 바깥으로 분출된다. 작품 초반, 영화는 주인공이 에스텔라와 크루엘라의 사이에서 자아가 혼동되는 와중에 천재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드라마로 전개될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리뷰하는데에 앞서 이 영화는 의식한다면 어떤 관객이라도 눈치챌 정도로 미장센에 큰 힘을 실은 작품이라고 먼저 말하고 싶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를 상징하는 장치는 크게는 두가지가 있다.

 

 

1. 쓰레기장에서 만난 버디 vs 바네로스의 달마시안

2. 빨갛게 염색한 머리 vs 태생적인 좌우 흑백의 머리

 


 또한 이야기의 흐름과 크루엘라의 작 중 성장이 어느정도 완성되었는지 표시하듯이 계속 등장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쓰레기'이다. 화려한 패션계가 중심이 되는 이 이야기에서 그와 대조되는 쓰레기와 쓰레기차는 끊임없이 관객 앞으로 등장한다. 이 미장센들을 엮어 <크루엘라>를 뜯어내 살펴보려고 한다.

 관객에게 '쓰레기'란 장치로 그녀의 성장을 표시하는 장면은 크게 4번 있다. 첫번째로는 유년시절이다.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스컹크라고 놀림받은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던 도중 남학생이 밀치는 바람에 쓰레기카트에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곳에서 강아지 '버디'를 조우하게 되는데 작중 버디는 언제나 에스텔라의 편에서 든든한 동료로서 등장하게 된다. 쓰레기카트 출신 강아지, 버디는 에스텔라의 평범함과 동료의 상징이다. 버디의 시선은 항상 에스텔라를 향하는데 중요한 것은 필자가 '에스텔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달마시안이 등장하는 뒷 내용에서 추가로 설명하겠다. 첫번째로 쓰레기장에 떨어진 그녀는 본성인 크루엘라를 죽이진 못하지만 타인에 의해 계속해서 에스텔라를 강요받고 또 에스텔라가 될려고 노력 한다. 이 장면은 유일하게 타인이 그녀를 쓰레기 방향으로 밀어낸 장면이기도 하다.

 두번째로 그녀가 '쓰레기' 장치를 만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 후 저택에서 도망쳐 런던으로 향하는 쓰레기 차에 몸을 던질 때이다. 추격하는 경찰과 사나운 달마시안들을 피해 그녀는 도망쳐야 했고, 스스로 달려오는 쓰레기차 위로 뛰어들어 런던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와 함께 가기로 했던 런던 분수 공원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재스퍼와 호러스를 만난다. 재스퍼와 호러스는 그녀의 새 가족, 한 팀이 되는데, 그녀는 이 만남 이 후로 완벽하게 에스텔라된 듯 보인다. 재스퍼는 에스텔라의 흑백머리를 보고 어울린다고 칭찬해주었지만 그녀는 좀도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리에 속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다. 살아남기 위해서 쓰레기로 뛰어들었듯이,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평범하게 물들였다. 어쩔 수 없이 쓰레기 차에 뛰어들었듯이,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좀도둑 무리에 소속하게 된다.

 

 헤어스타일에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한 것은 크루엘라를 표현하기에 굉장히 탁월하다. 머리카락은 어떤 시술을 거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고유의 색과 결이 되돌아오는 성질이 있다. 제 아무리 빨갛게 머리를 물들여 정체성을 속이더라도 뿌리가 크루엘라이기에 에스텔라는 결코 에스텔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무의식 속에 눈치챌 수 있다.


 타고난 그녀의 패션감각은 좀도둑질을 하는데 필요한 복장을 만드는데 유용했다. 평범한 승객, 화려한 재벌, 호텔리어까지 불가능한 변장은 없었다. 환상의 팀워크와 함께 그렇게 셋은 그럴싸한 아지트와 제 것이 아니지만 모자람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재스퍼의 도움으로 백화점에 취직한 그녀는 부푼 마음을 가진 채 출근했지만 비루한 청소부가 됐다. 수선부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에스텔라는 끊임없이 담당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지만 그는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라며 청소만 시킨다. 그럼에도 그녀는 백화점에서 다시끔 변화를 마주하게 되는데 관객은 이 대목에서 세번째 '쓰레기' 장치를 만나게 된다.

 청소부가 된 에스텔라는 쓰레기봉투를 가득 버리러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이번엔 쓰레기봉투가 쏟아져 아예 온몸을 더럽히고 만다. 그녀의 추태에 백화점 담당자는 잔뜩 화가 났고 사무실로 불러내 혼을 낸다. 에스텔라는 그 날밤 홀로 백화점 청소를 하던 도중 사무실 양주를 몰래 꺼내먹는데, 잔뜩 취하고는 쇼윈도를 자신의 마음대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그 쇼윈도는 운명처럼 패션계의 일류 '하우스 오브 바로네스'의 남작 부인 눈을 충족시켰고 에스텔라는 그곳에 취직하게 된다. 우연으로 터진 쓰레기봉투가 에스텔라를 덮친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운명처럼 남작부인이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는 에스텔라의 손으로, 어느 정도는 우연이 그의 운명을 도와준 것이다.

 그렇다면 절정의 마지막 '쓰레기'장치는 언제일까? 쓰레기차에서 나타나 파격적인 패션으로 남작부인을 도발할 때? 이 또한 동일한 미장센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 장면은 단지 패션적인 연출로 보아야지 타당하다. 오히려 크루엘라의 성장, 변화를 가져다준 장치는 다른 장면에 있다.

 바로 쓰레기차로 경찰서를 들이닥칠 때이다. 그녀는 크루엘라가 되어 재스퍼와 호러스를 마구 부려먹는다. 팀이 아닌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 속 크루엘라처럼 고용주 대 피고용인처럼 그들을 부려먹는다. 재스퍼와 호러스는 남작부인에 의해 경찰서에 구치되고 크루엘라는 출생의 비밀을 마주한 후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쓰레기차를 직접 몰고 나타난다. 그녀는 더이상 쓰레기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직접 그 차를 운전하여 주도성을 가지게 되었다. 완전한 크루엘라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이상 불가피하여 쓰레기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재스퍼와 호러스에게 지난 행실들에 대해 사과한다. 그리고 유일한 가족이라며 동정을 사 또 다시 그들을 꼬셔낸다.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에스텔라가 돌아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쓰레기차를 운전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운전'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목표달성에 이용할 뿐 더 이상 같은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단지 필요했기 때문에 차에 실었을 뿐이다.

 

그녀는 타의적으로 쓰레기카트 속에 묻혔고
살아남기 위해 쓰레기 차에 뛰어들었고
우연처럼 터진 쓰레기봉투처럼 운명처럼 바로네스에 몸을 담구게 됐고
쓰레기차를 운전한 것처럼 삶의 방향성의 키를 완벽히 거머쥐었다.

 


 이렇게 4번의 '쓰레기'장치를 지나온 크루엘라는 내면의 에스텔라를 완전히 죽여버리고 만다. 아예 장례식까리 치뤄버린다. 더 이상 세상에 '에스텔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크루엘라 드 빌' 악마같은 냉혈한 본성이 그녀 자체가 된다. 끝에서 그녀의 머리스타일은 어땠는가? 

 그녀는 머리를 모자로 숨기고 다녔고, 빨갛게 물들였고, 가발을 썼고, 끝에선 당당하게 좌우 흑백머리를 드러냈다. 가발조차 타버려 없어진 그녀는 더이상 에스텔라가 될 수도 없으며 될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크루엘라가 '헬 홀'의 주인이 된 마지막 장면에서 '호러스'의 대사를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징기스, 쟤 조금 살찐거 같지 않아?"

 

 '징기스'는 세 달마시안 중 한마리의 이름이다. 공포스런 살기를 드러냈던 존재에게 살이 쪘다는 야들야들한 형용사가 붙었다는 것은 동시에 그녀 안의 복수심이 사그라졌으며 조금은 날이 무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에 올라 적수가 없어진 그녀는 더이상 날을 세울 필요도 없고 달마시안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적을 향해 달려들 필요도 없다.

 

  이제 그녀의 곁엔 버디와 함께 세 달마시안이 머문다. 크루엘라는 남작부인의 몰락을 보며 깨달은 것이다. 정상에 올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선 버디도, 달마시안도 필요하다는 것을. 크루엘라는 이제 난폭하지만 우아한 숍에서 깔끔하게 미용된 복종스러운 그런 졸개도 필요하다. 의리있지만 쓰레기카트 출신의 추저운 잡종 버디와 더불어서 말이다. 하지만 더이상의 좀도둑질도 필요없는 마당에 버디가 달마시안들보다 빛날 무대가 생길까? 어쩌면 서서히 서서히 재스퍼와 호러스처럼 동등한 관계에서 추락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스텔라는 더이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디는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에스텔라와 동료, 그게 버디의 상징이니까. 에스텔라가 사라진 이 마당에 동료로서의 쓸모가 사라지는 순간 과연 버디는 여전히 크루엘라의 곁에 자리할 수 있을까? 가족을 거들먹거렸지만 재스퍼와 호러스도 긴장하여선 안된다.

 

과연 감독이, 이 작품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선인(善人)의 성장물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처음 들렸던 음성을 기억하는가? 초장에 자신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은 '에스텔라'였다. 크루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은 마당에 이것을 성장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이 작품은 천재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해야하는가?를 소개하는 영화이다.

 

 

'에스텔라'는 단지 향만 풍기면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면의 '크루엘라'이다. 우리 모두 '크루엘라'를 타고 났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에스텔라'를 강요받고 '크루엘라'를 죽이고 있을지 모른다. 감독은 말했다. '크루엘라를 선택해라. 그리고 성공해라.' 라고. 관객에게 묻고 싶다.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과연 '크루엘라'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패션계의 이단아로, 천재로 이름날린 그녀는 성공한 인생일까? 과연 이 작품은 해피엔딩일까?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준 것은 크고 아름답지만 손님 한 명 없는 저택의 분위기였고, 남작부인보다 더 천재적이고 더 치밀하고 더 악랄한 인물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는 것. 그것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이 때 들렸던 평화롭고 경쾌한 bgm은 어쩐지 크루엘라가 성공하였다고 강요하듯이 들렸다. 이 엔딩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관객의 판단에 달렸다. 이 엔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넓은 저택에서 모든 걸 다 가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는가?
더 사악한 또다른 바로네스의 왕권 교체라고 생각했는가?

 


 디즈니는 영화 <코코>를 통해 가족을 버리고 성공을 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메세지를 전달했었다. 그러나 <크루엘라>에선 가족같은 재스퍼와 호러스는 이젠 그녀의 졸개에 불과하다. 여태 디즈니의 재질과는 차별되긴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통일적인 메세지가 있다면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에도 결국 곁을 지켜주는 동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겨울왕국>의 엘사의 곁에 안나가 있었고 <모아나>의 마우이에겐 모아나가 있었다. <주먹왕 랄프>의 랄프에겐 바넬로피가 있었다. 그것은 <크루엘라>도 예외는 아니다. 재스퍼와 호러스, 버디가 크루엘라와 끝까지 함께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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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소감

 

예술은 선을 지향해야하는가?

 


 이것에 대한 정답은 아직도 분분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크루엘라>는 적어도 선을 지향한 작품이 아니다. 되려 성공을 위해선 자칫 악이 될 수도 있는 광기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아주 예외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다. 디즈니는 더이상 아동을 상대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이번엔 관객을 광기로 감싸는 위험한 작품을 만든 것 같다. 이 작품의 메세지는 호불호가 강하니 주의하면 좋겠다.

 

(+ 흑백 파티에서 크루엘라의 첫 등장은 제법 화려하고 굉장히 흥미로웠다. bgm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충분했으며 화려한 패션답게 사운드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에스텔라가 되기도 하고 크루엘라가 되기도 하였는데 영화는 그러지 못하였다. 항상 크루엘라처럼 사운드를 채워주었다. 너무 편향됐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계속 관객의 내면을 크루엘라로 동화시킬려는 듯 끊임없이 그것을 주입시켰다. 크루엘라는 분명 자극적이지만 무엇이든 너무 오래 노출된다면 지겹다. 제 아무리 화려한 패션이 있다고 한들 자주보면 어떤 패션이든 질리기 마련이다. <크루엘라>가 주는 메세지는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중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는가?



별점 : ★★★☆☆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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