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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戸締まり,2023) - 신카이 마코토 (대중들을 바라보고 새롭게 문을 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by 대담한도약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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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

 

 아주 오랫동안 홍보해오고 떡밥도 던져졌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3월 8일에 한국에서 개봉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명 '빛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빛과 관련한 미술적 연출이 무척 뛰어나며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하늘색 묘사가 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럴까, 이전 작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모두 하늘을 통해 벌어지는 재난사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 전전 작인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 5센티> 또한 재난사태의 소재는 아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벚꽃을 소재, 미장센으로 삼음으로써 감독 자신의 하늘 사랑을 적극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날씨의 아이>와 <너의 이름은>을 보지 않았다면 <스즈메의 문단속>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보면 무척 재밌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 관람 포인트는 <날씨의 아이>와 주제적으로 확실히 비교하는 것이었다. 두번째로는 주인공, 스즈메가 어째서 소타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모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과거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는지 정도일까? 만일 두 작품을 다 보았고 <스즈메의 문단속> 또한 보고 왔다면 분명 이 포스팅이 분석과 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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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이전 작과 다른 <스즈메의 문단속>의 소재, 그러나 반복되는 본인의 오마주들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1. 이전작과의 차별점

 

 이번 작품인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는 서론에서 언급한 하늘 대신 땅에 집중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 이전 작품들과 동일하게 천재지변의 재난상황을 다루고 있으나 이례적으로 하늘이 아닌 땅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소재로 삼았다. 장르 또한 '로드 무비'를 채택하여 자신의 장기인 '하늘로 관객 현혹시키기'가 아니라 각기 지방의 특색있는 전경들, 도심의 풍경들을 보여주는데 집중하였는데, 여러모로 이전 작의 실수와 고질병들을 피드백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말인가 하면 <날씨의 아이>의 경우 단언컨데 작품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단 미술적인 연출에 의도적으로 크게 비중을 실은 실수가 있었다. 주제적인 면에서도 물론 쉽사리 관객이 납득하기 난감한 주장을 펼쳐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꽤나 떨어졌는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러한 자신의 실책을 철저히 수정하려고하는 노력이 소재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혹시 <날씨의 아이>에 대한 주제를 곱씹어보고 싶다면 아래에 있는 링크를 보아도 좋다.)

 

 

 

<날씨의 아이> - 신카이 마코토 (하늘의 운명을 믿고 전체주의를 반성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에서 21년에 개봉한 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과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를 이끌어갈 인물로 기대받고 있는 명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다른 작품인 과 을 돌이켜보면 그

hellobrofriend.tistory.com

 

 성별에 따른 인물들의 역할에도 변화가 생겼다. <너의 이름은>에선 남주가 여주를 구하러 가고, <날씨의 아이>에서도 남주가 여주를 구하러 가는 설정이었다. 작 중 능력 또한 뼈대 깊은 종교적 가문이라던가 선택 받은 '맑음 소녀'라던가 비교적 여주가 더 비중이 컸는데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엔 남주인 소타가 더 특별한 능력과 배경을 지녔으며 여주가 위기에 빠진 남주를 구하러 가는 특징이 있다.

 

 

2. 반복되는 오마주들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의 일부 설정과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오마주하였다. <너의 이름은>을 상징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혜성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만날 수 있는 황혼의 시간도 떠오를 것이다. 황혼의 시간 때인 매직 아워의 하늘은 <스즈메의 문단속> 중 저 세상으로 묘사되는 문 너머의 풍경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죽은 자, 혹은 과거의 인물과 만나는 공간이 된다는 설정이 유사하다.

 

 <날씨의 아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비, 맑은 하늘, 구름 위의 풍경, 하늘에서 떨어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인데 <스즈메의 문단속>에선 지진의 전령, 악귀 같은 미미즈를 제압하면 마치 '맑음 소녀'가 소원을 빈 듯 잠깐 동안의 소나기가 떨어진 후 하늘이 맑게 갠다. 또한 주인공들이 미미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과 하늘에서 추락하는 모습은 <날씨의 아이> 중 남주가 구름 위에 도달해 '맑음 소녀'를 대면하는 장면, 함께 추락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만들며 주인공이 영화 초반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며 여정이 시작된다는 점도 그러하다.

 

 

 

▶ 새로운 시도, 흥행 상품 채택과 대중화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고양이 '다이진

 

1. 마스코트 동물의 등장

 신카이 마코토는 여태 자신의 작품에서 고양이 같은 동물을 적극 활용한 적이 없다. 그런데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다이진이라 불리는 고양이가 이야기 핵심 전개로 등장하며 심지어 귀여운 아동용 의자까지 마스코트로 채택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솔직히 이전 작품들의 경우 굿즈로 만들기에는 인물 피규어 말곤 적당한 마스코트들이 없지 않았는가. 이번 작품에서 마스코트화 시킬만 한 동물, 소품들이 등장한 것은 마치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토토로, 가오나시 같은 마스코트들의 존재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 이번 작품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영화 세계관을 적극 확장시킬려는 의도가 보였다. 일본의 여러 평론가들이 말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국민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정확히 자리 잡으려고 하였다고 말이다.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2. 영화적 주장의 대중화 (자신을 변화시킨 것인가 죽인 것인가)

 

 필자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제가 <날씨의 아이>의 주제와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에 변화를 주어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본다. <날씨의 아이>는 총을 습득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마치 과거 일본 제국시절에 만연했던 전체주의를 비판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나아가 제 아무리 도쿄 전체가 침수되더라도 단 한명의 개인(맑음 소녀)도 희생시킬 수 없다 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쳐냈다. 국가적인 상황에서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립은 어떤 방안도 정답이라고 확언할 수 없는 역사적인 딜레마이지 않은가. 웬만한 경우라면 <날씨의 아이>의 주장같은 스탠스는 무척 위태롭다. 마치 작년에 개봉했던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의 주장이 그러했 듯 말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러한 전 작의 위태로움을 확실히 피드백하였다.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주인공, 소타)

 

 <날씨의 아이>에 등장했던 '맑음 소녀'의 자리는 <스즈메의 문단속> 속 '요석'으로 대체되었다. '우리의 존재 중 누군가는 희생의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다.' 이것이 <스즈메의 문단속>의 첫번째 주장인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등장한 것이 '토지시'(문지기), '소타'와 스즈메의 이모, '타마키'이다. 소타의 경우 재난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가업을 물려받은 인물인데 마치 소방사, 경찰관과 같이 사회적 책임을 지는 직종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모인 타마키는 스즈메가 고아가 되자 그녀의 육아를 자진한 인물인데 소타는 토지시 임무를 임하기 위해 임용고시를 포기하는 희생을 치뤘으며 타마키의 경우 결혼과 자유시간을 희생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였을까?

 그들의 선택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대의를 위한다는 도덕성, 사랑과 자발적인 선택에 있다. <날씨의 아이>에서 전체주의가 부각됐던 이유는 '맑음 소녀'의 희생 선택에 사회적 강압이 간섭했기 때문인데 <스즈메의 문단속>에 등장하는 희생에는 그러한 사회적인 강압이 없거나 생략되어 있다. 아마 소타가 저주를 받고 요석이 된 것은 자발적이지 않았다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소타가 그러한 자신의 운명에 애써 수긍한 것을 보면 그 운명은 아마 토지시가 되기로 결심했던 영화 바깥의 배경에 이미 전제되었을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소타의 그러한 희생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스즈메의 태도가 그러한 취약점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보완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두번째 주장은 '희생의 자리는 강압이 아닌 사랑에 근거한 자발적인 선택이여야 한다.'가 된다.

 

첫번째 주장 : '우리의 존재 중 누군가는 희생의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다.'
두번째 주장 : '희생의 자리는 강압이 아닌 사랑에 근거한 자발적인 선택이여야 한다.'

 

 확실히 <날씨의 아이>의 주장인 '전체주의를 위해 개인은 전혀 희생할 필요가 없다.'와는 너무나도 다른 스탠스이다. 무엇보다 '강압적'이라는 단어와 억양이 확실하게 빠져있다. <날씨의 아이>의 영화적 논쟁 논란을 확실히 피드백한 것이다. (근데 솔직히 이게 감독의 진심인지 아니면 대중의 눈치를 본 것인지 조금 긴가민가하다.)

 

(굳이 세번째 주장을 말해보자면 문단속과 토지시라는 직업의 판타지적인 설정, 엔딩에서 커플과 썸씽이 탄생한다는 것을 견주어보았을 때 아마 '희생의 대가로 소중한 일상이 수호되고 희망찬 미래가 기다릴 것이다.' 라는 거? 뭐 당연한 말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핵심 주제

 

 

 앞서 언급한 주장들은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이다. '로드 무비'라는 장르는 가령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나 데니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처럼 어떠한 해답이나 구원을 갈구하고 방황하는 이야기에 쓰이곤 한다. 스즈메가 어떤 부분에 결핍이 있는지는 그녀의 회상씬에서 간략히 언급되는데 그것은 '상실에 대처하고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법'이 아닌가 싶다. 스즈메는 과거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부모를 잃게 되는데 만 16세가 되어서도 부숴진 아동용 의자를 어머니의 유품으로 소중히 여기며 그리움에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자신을 거두어 준 이모와의 관계는 꽤 건조한 듯하다. 그러한 스즈메는 사라진 요석, 다이진을 찾아 일본 열도를 누비고 다니며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들을 만난다. 또한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진심으로 스즈메의 안부를 걱정하는 그녀의 이모, 타마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즈메는 이러한 로드 무비의 여정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했던 '상실에 대처하는 법'이 바로 서로의 상처를 보완해줄 새로운 인연과 함께 유대를 쌓는 것임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자면 스즈메는 자신이 이모나 소타의 존재, 즉 사랑으로 희생하는 이들의 존재를 너무나도 홀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즈메는 자신 또한 희생하는 이가 되기를 결심하고 소타를 대신해 요석이 될 각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문 너머 과거,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희망찬 미래를 전망해준 것이다. 이렇게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는 주제는 <날씨의 아이>의 피드백이라기 보단 오히려 <너의 이름은>의 주제와 유사하다.

 

 

 <스즈메의 문단속> 미장센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어머니의 유품, 저주걸린 소타)

 영화 속 미장센이라고 한다면 가령 영화 초반 등굣길에 기찻길 같은 선을 넘어간 학우들과 그렇지 않은 주인공, 스즈메의 이미지 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리 세세히 분석하면 너무 많을 것 같으니 소품 정도만 가볍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의자이다. 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수 많은 소품들 중 아동용 의자를, 그것도 다리 빠진 의자를 채택한 것일까? 의자는 우리 일상 속에서 흔히 앉거나 기대어 쉴 때 사용하는 가구이다. 즉 '심신을 의지한다.'는 뉘앙스가 짙은 것인데 이것은 곧 앞서 언급한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제와 연관이 있다. 또한 의자의 다리가 빠진 것은 부모를 잃은 고아, 스즈메의 심적 결핍, 위태로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게 작 중 소타가 입었던 육체적인 상처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분명 소타는 첫번째 문단속을 할 때 온천 폐허에서 스즈메를 구해주다가 떨어지는 철골에 스쳐 오른쪽 팔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것을 고증하여 소타가 저주에 걸릴 의자 또한 다리 하나가 고장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론 왜 굳이 이승 저승을 나누는 매개체로 문을 선택했냐는 것인데 물론 단순히 생각하면 문틀은 공간을 구분짓는 용도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영화의 주제와 엔딩과 연관된 설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엔딩에서 시간이 흐른 스즈메와 소타는 그들이 처음 조우했던 그 비탈길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그 때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한마디를 건네는데 그 말을 직역하자면 '다녀왔습니다.'정도가 된다. 우린 평소에 외출을 하거나 복귀를 할 때 문을 열고 나가며 누군가에게 말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또는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희생하는 부모님이나 연인 또는 다른 이들을 당연시 여기거나 홀대시하지 않았는지 곱씹어보게 만드는데 문을 판타지적인 소품으로 사용한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1회차 관람이라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등교하면서 이모한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했던가...)

 

 그리고 작 중 등장하는 다이진과 사다이진의 얼굴을 보면 다이진은 우측 눈덩이에 얼룩이 있고 사다이진은 좌측 눈덩이에 얼룩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소품은 아니지만 스즈메의 어머니의 직업이 간호사이고 소타와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가 교사를 희망한다는 것은 사랑과 대의를 전제로 한 직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주제적으로도 연관이 있는 대목이다. 또한 첫번째 여행 조력자가 각지 사람들이 모이는 숙박업소 딸이라는 점, 두번째 조력자가 여러 사람들이 흥겹게 어울리는 술집 사장이란 점도 주제적으로 연관이 있다.


◈ 소감

 

- 개인적으로 <너의 이름은>(2017)과 <날씨의 아이>(2019)를 비교해보면 <날씨의 아이>를 통해 진화한 애니메이션 그래픽을 체감할 수 있었는데 <날씨의 아이>(2019)와 <스즈메의 문단속>(2023)을 비교해보면 딱히 그래픽이 발전했는지 체감이 잘 안가긴 했다. 그래도 확실히 빛의 이미지가 화려한 것은 여전했다.

 

- 일본 애니의 전형적인 틀이긴 하나 여전히 주인공은 미성년자이다. 근데 고등학생이랑 대학생이 이렇게 사랑을 하는판타지로 가야 했나 싶긴 하다. 어찌 됐든 <날씨의 아이>에서 발전하고 변화한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은 신선하기도 하고 뭔가 적적하기도 했다. <날씨의 아이>가 주제적으론 동의할 순 없지만 나름 그 주제가 광기가 있었던 거 같아서 그거 하나는 맘에 들었는데 갑자기 너무 작품 자체가 전체적으로 대중적으로 나오니 좀 시원섭섭했다.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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