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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 스티븐 스필버그 (A.I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스필버그의 빌드업)

by 대담한도약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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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01) - 스티븐 스필버그


포스터부터 흥미롭다. 평범한 영화들과는 다르게 영화 제목인 'A.I' 라는 로고하나만 박아놓고 영화를 설명하는 것은 6줄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저 6줄로는 결코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 포스터로는 단지 갈색머리를 가진 어린아이 모습의 AI만 상상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정말 말도 안되는 필모그래피와 수상기록을 가진 유일무이한 최고의 명감독이다. 모든 것이 뛰어나지만 그 모든 작품 중 이 영화를 필자는 단연 최고의 마스터피스라고 하고 싶다.

이 영화는 사랑이란 감정을 탑재하고 생산된 '데이빗'이라는 A.I가 겪는 일대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비록 A.I지만 데이빗 그만의 사랑을 관철하는 모습을 관객은 애탄하며 지켜보게 된다. 그로써 관객은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이 아닌 '인간의 모방품'으로부터 인간을 되돌아보는 사고의 연계를 겪는다. 이 영화를 계기로 AI를 다루는 문학의 진보가 얼마나 나아갔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실제로 지금, 2022년까지의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단 것을 우린 목격하였다.

아마 이 작품이 수많은 평론가와 관객들에게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받은 것은 결국 로봇이 인격체로서 대우받게 되는 극강의 설득력, 그로써 강요받지 않고 관객 스스로 영화를 되새긴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스트 스토리>와 <그린 나이트>의 감독인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작품의 경우 엑스트라의 장황한 대사없인 결코 휘몰아치는 메세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의 경우 강요라면 강요일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관객이 공통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 놀랍다.

이 글의 끝에서 결론 내보고 싶은 이야기는 '왜 이 작품의 ai가 어린 아이로 설정되었는가?'이다. 즉,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한 수많은 사랑의 모습 중 왜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택하였는가? 가 될 것이다. 또한 글의 중점적으로는 데이빗을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감독이 어떤 장치들이 쓰여졌는지 조명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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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 세계관 설정부터 비극의 전말

영화는 세계관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인류의 발전의 부작용으로 결국 세계의 빙하가 모두 녹아버렸다. 국가는 임신 허가제라는 법을 규정하여 인구수를 규제하기까지 이르렀으며 사람들은 수많은 ai를 생산해내 부족한 인구를 대체, 욕구를 충족시켰다. ai는 애인 대행, 사무직, 가사노동은 물론 수많은 직종에서 사용되었으며 주인공인 데이빗의 경우 임신 허가제와 같은 이유로 아이가 필요한 가정에 보내지는 아이 대행 로봇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아이를 대신한다는 목표와 상업성에 의문을 품은 직원들이 많았다. 수요는 있을 것인가? 다시말해 로봇의 감정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들 로봇을 사랑하는 인간의 감정은 과연 생겨날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과 세계관 설명이 흘러가는 초반 부분은 쉽게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곱씹어보았을 때 사실 처음부터 영화의 결말은 비극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을 진작 할 수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 대행 로봇의 목적은 결국 상업성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아이를 원하는 부모들의 욕구를 채우자는 명목이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정세를 기반한 시장조사내용일 뿐이었다. 가정의 사랑을 받는 로봇을 제공하자는 내용은 반려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목적은 결국 사랑해줄 생명체가 필요하다는 인간의 욕구를 기반하였다. 반려동물시장에서 동물을 번식시키고 분양하는 업자들은 물론 동물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동물은 그들의 사업수단에 불과하지 않은가. 데이빗 또한 그런 수단으로 만들어진 비극을 타고났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단 하나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환경오염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한다는 대의적인 이유로 묵인되고 있다. 로봇이 아이를 대체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로봇이 대체한다 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문제이다. 만일 이것이 상용화된다면 아이를 낳아 성인으로 길러내는 가정은 희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세계에선 인간이 로봇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즉, 잘 팔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AI 회사대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아담을 만들 때에도 사랑해주려고 창조한거잖아요?

데이빗을 자신의 로봇으로 등록하고 있다.


데이빗은 처음부터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데이빗이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선 데이빗의 목덜미를 잡고 주어진 단어 7개를 메뉴얼대로 불러주어야했다. 그리고 이것을 성공적으로 이행했을 경우 데이빗은 호칭을 아줌마에서 엄마로 바꿔부른다.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그럴싸하게 유추해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로봇은 단지 입력만 한다면 순수한 사랑을 영원히 표현한다. 그는 아직 로봇의 틀 안에 있다. 아직은 말이다.

  • 데이빗을 인간으로 만드는 감독의 작업

이 작품은 데이빗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가 로봇처럼 보이게 만드는 끝없는 줄타기를 반복한다. 그를 위해 수많은 연출이 있었지만 필자가 관람하며 정말 감탄했던 연출적 장치는 바로 슈퍼 로봇 곰인형 '테디'였다. 비교적 구형AI를 탑재하였으며 외형 또한 인간이 아닌 곰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테디는 인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개체로 나온다.
테디의 등장으로 가정 안에는 인간, 로봇,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인간 데이빗이 동거하게 된다. 데이빗은 인간과 로봇의 벽을 허물고 진짜 아들이 되고 싶어하지만 진짜 사람아들 마틴의 등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위협받는다. 그리고 마틴은 테디와 데이빗, 둘의 성능을 비교하며 유사인간과 로봇을 똑같은 반려로봇으로 귀속시킨다. 로봇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온 데이빗은 엄마에게 쓴 편지에 분명 처음엔 테디를 사랑한다고 적었으나 마지막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난 진짜 엄마 아들이예요. 테디는 진짜가 아니라서 싫어요.

난 진짜 엄마 아들이예요. 마틴도 아들이지만 테디는 아니예요.


그는 결국 인간과 로봇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스스로의 소속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부모가 데이빗을 사랑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데이빗은 아이다운, 그리고 로봇다운 실수를 계속해서 범한다. 먹어선 안될 음식을 먹고 얼굴이 뭉개져 괴기한 모습이 되며 고장나기도 하고, 마틴의 속셈에 넘어가 엄마의 머리칼을 자르려다 눈을 찌르기도 한다. 심지어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감각 수용체때문에 무섭다며 마틴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그를 익사시킬 뻔한다. 가정에선 결국 반려로봇인 데이빗을 폐기시키기로 결정한다.

고칠 수 없는 가정기기들은 폐기하는 것이 옳지만 데이빗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폐기시킨다는 것은 말을 듣지 않는단 이유로 아이를 안락사시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데이빗을 폐기시키지 않는다. 대신 숲 속에 유기시킨다. 유기동물처럼 말이다. 이 때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유기되기 이전에는 인간과 AI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주제였다면 이제는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AI의 이야기가 된다. 즉 유기됨으로써 데이빗은 테디와 같은 완전한 로봇이라고 귀속된다. 그리고 데이빗은 진짜 인간이 되길 원한다.

로봇축제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AI들

영화는 다시 로봇의 이야기를 한다. 여러 사정으로인해 데이빗처럼 유기된 로봇들이 숲 속에 넘쳐났는데 그들은 로봇축제에서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데이빗보다 열등한 AI와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로봇축제는 로봇이 인간의 입지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그들을 처형하고 생명을 찬미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데이빗은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를 진짜 사람아이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데이빗을 죽일려고 한 행사진들을 비난하고 그를 놓아줄 것을 외쳤다. 그렇게 데이빗은 다시 인간의 입지에 도전하게 된다. 로봇축제에서 그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면서도 그들과 다른 독보적인 존재인 것 또한 깨닫게 된다. 어쩌면 데이빗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인간의 대우를 받게 될까? 라는 가능성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또한 그들이 로봇축제장에서 도망쳐나올 때 로봇축제라 적힌 문구 아래 '생명의 찬미'라고 적혀있었는데 그런 축제에서 로봇인 데이빗을 생명으로 여긴 것은 흥미롭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생명의 기준으로 여기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데이빗과 애인 대행 로봇 '조', 그리고 테디는 한 팀이 되어 붉은 도시로 향한다. 이 삼인조는 이전에 마틴, 데이빗, 테디를 떠올리게 한다. 이전엔 마틴이 인간의 포지션이었다면 지금은 데이빗이 인간, 조가 유사인간의 포지션을 맡고 있다. 확실하게 데이빗은 인간이 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많은 로봇 중 애인 대행 로봇인 조가 데이빗에게 합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인만큼 여자를 사랑하는 로봇인 '조'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스필버그 감독의 가히 경이로운 촘촘한 인물설정과 연출

잠시 이야기에서 벗어나 스필버그 감독의 강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필자는 빈틈없고 확실한 세계관과 인물설정들이야 말로 확실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붉은 도시로 가기 위해 조는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애인 대행 로봇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외로운 인간이 죄책감없이 우리를 갖고 놀 수 있는거지.
우리는 인간의 아래에서, 인간의 위에서,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일해.  


그는 자신과 같은 애인 대행로봇의 포지션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씁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작품 속 모든 AI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탑재하고 있으리라. 로봇축제 처형 전 감각수용체를 꺼달라는 로봇의 부탁도 그렇고 이 작품의 모든 인물들은 대본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여 내뱉는 것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몰입력이 배가 되는 듯했다. 이 대사는 데이빗과 다른 로봇들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기에 주목할만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위와 같은 발언, 생각은 다른 로봇들은 모두 갖고 있지만 데이빗은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의 아래와 위가 아닌 인간과 동등하며 특별하고 단 하나뿐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발짝 더 나아가 타 로봇과 데이빗의 확실한 차이는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있다. 다른 로봇들의 경우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 인간이 자신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버림받은 이유도 직업에 충실했는지의 여부에 있다고 판단한다. 타 로봇이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면 데이빗은 그렇지 않다. '부모에게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모'라는 대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도 '아들'이라는 직업에 충실하지 않은게 아니라 단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판단한다. 그렇기에 애인이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조보다 데이빗이 조금 더 사람같이 연출되는 것이다. 아마 데이빗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근거는 마틴 또한 자신처럼 완벽한 아들이 아니라고 분석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가령 시기, 질투, 유치한 마음씨와 같은 부분에서 말이다. 자신의 실수는 인간도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스필버그의 소름돋는 인물설정은 데이빗뿐만 아니다. 그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인 허빗 교수를 분석해보자. 그는 데이빗을 만들자고 이사진들을 설득한 장본인이다. 로봇축제 씬이 끝나고 허빗 교수의 사무실 같은 곳이 비춰지는데 그곳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 허빗 교수에겐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의 이름은 데이빗이며 로봇 데이빗과 모든게 동일한 외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해튼까지 도달한 로봇 데이빗에게 허빗교수는 자신이 파란 요정과 같은 존재라며 데이빗에게 너는 진짜 사람 아이가 맞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데이빗은 납득하지 못한다. 허빗교수는 연달아 말한다.

  너는 동화를 스스로 발견했어.
사랑으로 가득하고 소망으로 불타는 요정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나 온 거란다.
존재하지 않는 파란 요정을 바라는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거나 꿈을 끝없이 쫓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재능이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향한 추론을 스스로 한거야.

  

이 발언은 허빗교수가 왜 데이빗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왜 가정에서 데이빗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파란 요정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즉 로봇이 사람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란 요정을 쫓았다. 즉, 그럼에도 사람이 아닌 로봇을 아들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진심이었다.

데이빗은 자신을 개발한 사무실에 도달한다. 그곳엔 자신을 개발하던 잔재들이 널부러져있었는데 그것들은 데이빗 본인이 인간과 같은 존엄성있는 존재라 여겼던 소신을 처참히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 처음 본 장면이 된 큰 새마저 복제품들도 똑같이 봤으리라 라는 충격, 그리고 자신이 상자에 담겨 판매되었을 제품이었다는 점에 데이빗은 건물 바깥에서 투신하고 만다. 조는 타고온 헬기를 이용하여 데이빗을 건져올린다. 그리고 자신은 미등록 로봇을 납치하는 기계에 끌려가는데 데이빗에게 진짜 인간이 되면 여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어쩌면 인간들은 결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지만 조 자신은 인간을 사랑하려고 한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껍데기를 투과해 회사 로고를 본 데이빗


그는 물에 잠긴 놀이동산의 잔재에서 파란 요정을 발견한다. 그리고 수천년동안 파란요정에게 소원을 빌며 전원이 꺼진다. 시간은 수천년을 지난다. 데이빗은 그동안 파란 요정을 자처한 허빗 교수, 파란 요정 조각상, 파란 요정 ai까지 만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진짜 인간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빗이 인간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오직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엄마를 복원하기를 소원한다. 오로지 데이빗의 모든 여정은 엄마를 향한 사랑 단 하나 뿐이었다는 것을 결말에서 입증한 것이다. 그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최고의 하루를 즐기곤 사람처럼 잠을 자고 꿈을 꾸며 영화는 끝이 난다.

  • 왜 주인공은 아이 대행 로봇으로 설정되었는가?

생명을 가장 생명답게 만드는 것은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 중 우리가 가장 경외심을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격체의 대명사이기에 사랑하는 로봇이 AI를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절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주인공 후보는 애인 대행 로봇인 '조'와 아이 대행 로봇인 '데이빗'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애인의 경우 언제나 대체가능한 다른 애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랑이 목적이 아닌 연애관계도 빈번하기에 모성애에 비해 그 무게가 현저히 가볍다. 그러나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다르다. 하나의 탯줄엔 하나의 아이만이 태어나고 두명의 부모는 생길 수 없다. 그렇기에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말하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랑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허빗 교수의 경우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데이빗 로봇을 제작하였고 맨해튼을 찾아본 데이빗이 감격스러워 뿌듯한 미소와 눈물을 보였다. 그는 진정으로 개발자들을 탯줄로 이어진 데이빗의 엄마와 아빠라고 여겼다. 신빙성이 낮은 소리지만 말이다. 또한 데이빗을 입양한 마틴의 엄마 모니카의 경우에도 데이빗을 유기한 후 허빗 교수에게 연락을 취하여 데이빗의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그를 유기한 후로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했던 것으로 추리된다. 데이빗은 개발실의 풍경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봇을 로봇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 인간의 마음 또한 데이빗의 사랑처럼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쨋든 사랑을 말하기 위해선 가장 순수한 장르가 되어야 했다.

두번째로 인간이 되고픈 욕구이다. 로봇이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이 로봇이 되는 것만큼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연애를 할 정도로 성숙한 인격체로 만들어졌다면 파란 요정을 믿기는 커녕 두번 다신 돌아올 수 없다는 맨해튼에는 결코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쳐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다녔을 것이다. 이 영화의 메인 주제는 사랑이지만 서브 주제는 파란 요정을 믿는 인간, 혹은 로봇의 여정이다. 그렇기에 성숙한 어른으로 주인공을 설정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리라.


  • 소감

영화의 장르가 가족물과 호러물을 넘나들어서 러닝타임동안 지루할 틈이 없어서 좋았다. 다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만년설로 도시가 잠겼다는 것은 아무래도 결말부분의 맨해튼을 통한 시각적인 요소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빗 교수가 데이빗을 보고 싶은거였다면 굳이 물에 잠긴 맨해튼 지부가 아닌 엄마인 모니카와 함께 타고 갔던 숲 속에 있는 사이버트로닉스 지부였어도 됐기 때문에 굳이 개연성을 깨가며 맨해튼으로 향한 것은 시나리오적인 옥의 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영화 자체가 미친듯한 몰입력과 생생함을 전달해주기 때문에 시청하고 있는 당시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 끼워맞춘다면 원래 데이빗이랑 살던 곳이 물에 잠기기 전의 맨해튼이었다면 모르겠다.

둘째로 아들인 데이빗을 개발한 것은 그렇다치고 딸 '달린' 제품은 왜 개발 중이었는지가 의문이다. 이 부분은 허빗교수의 데이빗을 향한 사랑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아무쪼록 개발실 씬에서 소름돋게 만드는 장치로 한몫했으니까 전혀 쓸데없는 장치는 아니듯하다.

아무쪼록 스티븐 스필버그의 디테일과 연출력을 체감할 수 있는 마스터피스를 이제서야 봐서 감사했다. 이 작품은 AI를 다룬 SF영화의 한획을 그은 수준이 아니라 그 자체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ai의 사랑 연장선에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그녀)>가 있는데 이 영화는 서정적인 쪽이다만 확실히 재미지다.


▶한줄평

창조주 스필버그가 보여준 SF동화의 저력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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